
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로마』의 첫 장면에서 물이 타일 바닥을 씻어내리는 소리와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이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한 서정적인 은유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흑백 영화 『로마』는 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을 그린다. 70년대 멕시코 시티의 한 중산층 가정과 그 집에서 일하는 원주민 가정부 클레오의 이야기를 통, 우리는 삶의 일상적인 순간들이 어떻게 영원한 기억으로 남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래비티』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등 다수의 화려한 블록버스터로 명성을 쌓은 쿠아론이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첫 사례로도 의미가 있다.
시간의 파도: 기억의 미학
『로마』는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한 노스탤지어를 넘어선다. 쿠아론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면서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클레오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아이들의 양육자이자 가정의 심장과도 같은 클레오, 그녀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은 계급, 인종, 젠더의 복잡한 교차점을 드러낸다. 이 시선의 전환이야말로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이다.
흑백 화면 속에서 우리는 색을 잊지만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쿠아론의 카메라는 마치 기억의 필터를 거친 듯 선명하면서도 아련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기억의 본질을 탐구하는 미학적 결정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쿠아론이 직접 촬영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에마누엘 루베즈키와 협업하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기억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내기로 한 결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는 마치 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 같은 사적인 행위이며 그만큼 이 영화에 대한 그의 헌신을 보여준다.
영화가 채택한 65mm 디지털 카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영화적 문법을 소환한다. 폭넓은 화각과 깊은 심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속 모든 요소를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마치 기억 속에서 중요한 순간을 떠올릴 때 그 순간의 모든 세부 사항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경험과 닮아있다.
시선의 역학: 카메라와 공간
『로마』의 카메라 움직임은 마치 무심한 듯하지만 사실 매우 계산된 것이다.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 숏들은 관객을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그 공간의 일부로 만든다. 특히 병원 장면에서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은 클레오의 감정적 여정을 함께 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연출 기법을 넘어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정서적 연결의 도구다.
영화 속 소리의 활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대화보다는 생활 소음, 자연의 소리, 도시의 소음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언어 이전의 혹은 언어를 넘어선 공감각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바다의 파도 소리, 개 짖는 소리, 자동차 소음, 시위대의 함성 -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가정집이라는 공간의 활용도 매우 독특하다. 쿠아론은 클레오가 일하는 집의 구조를 통해 계급의 위계질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2층과 1층, 옥상과 지하, 거실과 부엌 - 이 공간들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특히 좁은 복도와 계단은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반영한다. 클레오가 자유롭게 집안을 오가면서도 결코 그 집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 서서 보지 말고 앉아서 영화 봐."
소피아가 클레오에게 건네는 이 짧은 대사는 두 여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함축한다. 겉으로는 평등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명확한 계급적 경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쿠아론은 이 관계를 단순히 착취적인 것으로 그리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애정과 의존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역사의 물결 속 개인의 서사
『로마』는 개인의 서사와 사회의 서사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클레오의 일상과 사랑, 상실은 1970년대 멕시코의 사회적 격변과 함께 진행된다.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살'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이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개인의 삶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결코 거창한 역사적 서사가 아니라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미묘한 파장을 드러낸다.
영화 속 안토니오 박사와 그 동료들과의 대사는 당시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억압적인 정부 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이것이 결국 폭력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이후 실제로 발생하는 학생 시위 진압 장면은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다. 가구점에서 소파를 고르던 클레오가 창밖으로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쫓기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은 사적인 순간과 공적인 역사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쿠아론은 이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그는 카메라를 클레오에게 고정시킴으로써 거대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개인의 삶이 계속됨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 거대 서사가 아닌, 일상의 미시사로서의 역사다.
심지어 클레오가 임신한 사실을 페르민에게 알리러 영화관을 찾았을 때조차 스크린에는 우주 비행사가 등장하는 영화가 상영 중이다. 이는 쿠아론의 전작 『그래비티』를 연상시키며 개인의 작은 드라마가 우주적 스케일의 서사와 나란히 진행됨을 암시한다. 대중 매체와 개인의 삶,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장면은 영화의 여러 층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모성과 상실: 여성의 연대
『로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관계는 단연 클레오와 소피아 사이의 관계다. 이들은 계급적으로는 고용주와 가정부이지만 감정적으로는 함께 상실을 경험하는 동반자다. 소피아는 남편의 배신으로 클레오는 연인의 외면과 아이의 사산으로 각자의 상실을 겪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버려진 여성이라는 점이다.
"난 너무 혼자였어.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더 나쁘게 됐을 거야."
이 대사는 소피아와 클레오, 두 여성의 삶이 얼마나 다르면서도 닮았는지를 보여준다. 계급과 인종의 벽을 넘어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버려진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쿠아론은 이들의 관계를 단순히 고용주와 가정부의 관계로 규정짓지 않는다. 대신 이들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과 모순,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클레오의 모성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그녀는 생물학적 어머니가 되지 못했지만 소피아의 아이들에게 정서적 어머니로 존재한다. 아이들이 클레오에게 보이는 애정은 진실하고 순수하다. 이는 혈연을 넘어선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쿠아론은 이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는다. 클레오의 모성은 그녀의 노동력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녀의 정체성은 항상 "가정부"라는 직업적 정체성과 함께 존재한다.
사산 장면은 영화의 가장 충격적이고 감정적인 순간이다. 병원에서 클레오가 죽은 아이를 잠시 안고 있는 짧은 순간은 관객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쿠아론은 이 장면을 통해 클레오의 깊은 상실감을 표현하면서도 그녀가 그 상실을 어떻게 감내하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면의 미학적 선택—정적인 구도, 길게 이어지는 테이크, 클레오의 눈물에 초점을 맞춘 클로즈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게 만든다.
『로마』는 모성을 단순히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여성들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모성을 경험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기쁨만큼이나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의 연대는 바로 이 공통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소피아가 클레오에게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은 두 여성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