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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스토리': 시간의 잔해 속, 사랑과 상실의 영원한 속삭임

by reward100 2025. 5. 13.

 

Film, A Ghost Story, 2017

서론: 하얀 천 아래의 유령, 침묵으로 말하는 존재의 무게와 시간의 영속성

데이비드 로워리 (David Lowery)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 (A Ghost Story, 2017)'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공포 영화 속 유령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극도로 미니멀하고도 시적인 방식으로 시간, 사랑, 상실, 그리고 존재의 영속성이라는 거대하고도 근원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젊은 부부 C (케이시 애플렉, Casey Affleck 분)와 M (루니 마라, Rooney Mara 분)이 함께 살던 교외의 작은 집을 배경으로 C가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후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이 되어 홀로 남겨진 M의 곁을 맴돌고 그녀가 떠나간 후에도 그 집에 남아 영겁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유령은 특별한 능력도,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시간의 무자비한 흐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깊이, 그리고 우리가 남기는 흔적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명상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고스트 스토리'는 대사를 극도로 절제하고 이미지와 분위기, 그리고 다니엘 하트(Daniel Hart)의 아름답고도 애절한 음악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며 관객에게 깊은 슬픔과 동시에 잔잔한 위로를 건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적인 경험과 같은 영화이다.

C와 M: 사랑의 기억, 남겨진 자의 슬픔과 떠도는 자의 응시, 그리고 파이 한 조각

영화의 초반부는 C와 M이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순간들과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짧고 함축적인 장면들로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며 사랑하지만 M은 이사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C는 현재의 집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C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M은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잠긴다. 그녀가 병원에서 C의 시신을 확인하고 하얀 천을 덮어주는 장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C가 남긴 파이를 허겁지겁 먹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남겨진 자의 고통과 슬픔을 극도로 사실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파이 장면은 대사 한마디 없이도 M의 복잡한 감정 – 슬픔, 분노, 허무함, 그리고 삶을 지속해야 하는 막막함 – 을 강렬하게 전달하는 명장면이다.

한편, 유령이 된 C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M의 곁을 맴돌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거나 위로를 건넬 수 없다. 그는 그저 무력한 관찰자로서 그녀의 슬픔을 지켜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떠나간 자의 안타까움과 소통 불가능의 고독을 상징한다. M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결국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유령 C는 깊은 절망감과 함께 그 집에 대한 더욱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그는 M이 벽 틈에 숨겨둔 쪽지를 읽기 위해 그 집에 남아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버린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 가진 애착과 미련의 깊이를 생각하게 한다. C의 유령은 단순한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상실, 그리고 기억의 무게를 짊어진 채 시간을 떠도는 우리 모두의 내면 풍경일 수 있다.

시간의 영속성과 순환: 집이라는 공간, 기억의 퇴적층과 우주적 관점

M이 떠나간 후, 유령 C는 홀로 남겨진 집에서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집에는 새로운 가족들이 이사 와서 살다가 떠나가고 건물은 철거되었다가 미래적인 고층 빌딩으로 재건축되기도 하며 심지어 아주 먼 과거의 개척 시대 풍경까지 나타난다. 시간은 때로는 빠르게 흘러가고 때로는 극도로 느리게 정체되며 유령 C는 이 모든 변화를 묵묵히 지켜본다. 이러한 시간의 묘사는 개인의 삶이라는 짧은 순간을 넘어선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시간의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한다는 것이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마치 시간의 퇴적층처럼 그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 그리고 역사의 흔적들을 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특히 영화 속에서 한 파티 장면에서 어떤 남자가 인류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소멸할 운명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은 이러한 우주적 시간관과 연결된다.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언젠가는 모두 잊히고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유령 C의 존재는 이러한 허무주의에 대한 반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사랑과 기억, 그리고 M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그의 집요한 기다림은 시간과 소멸을 넘어서는 어떤 영적인 가치의 존재를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는 시간의 무자비함과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사랑과 기억이라는 인간적인 가치가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지속될 수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남긴다.

유령의 시선: 관찰자로서의 존재, 소통 불가능의 고독과 미세한 개입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 C의 모습은 매우 단순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그의 눈구멍은 텅 비어 있지만 우리는 그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수동적인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는 M이 슬퍼할 때 그녀를 안아주거나 위로할 수 없고 새로운 가족들이 집에 이사 와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통 불가능의 상태는 유령 C의 깊은 고독과 무력감을 강조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빈자리를 바라봐야 하는 모든 이들의 슬픔을 대변한다.

하지만 유령 C는 때때로 아주 미세한 방식으로 현실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는 M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전등을 깜빡거리게 하거나 물건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고 새로운 가족들이 이사 왔을 때는 그들을 겁주어 쫓아내려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질투심이나 분노, 혹은 집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욕망을 드러낸다. 특히 그가 벽 틈에 숨겨진 M의 쪽지를 꺼내기 위해 수없이 벽을 긁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그의 집요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존재는 비록 미미하고 무력해 보일지라도 그의 사랑과 기억은 그 집이라는 공간 속에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쪽지의 비밀: 기다림의 의미와 놓아줌의 과정, 그리고 순환의 고리

유령 C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M의 쪽지에는 과연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영화는 끝내 그 내용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유령 C가 마침내 쪽지를 읽고 난 후 그는 하얀 천을 벗어던지고 소멸하듯 사라진다. 이는 쪽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이 C에게 어떤 해방이나 깨달음을 주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쪽지에는 M의 마지막 사랑 고백이나 작별 인사가 담겨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C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쪽지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읽음으로써 C가 마침내 M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과거로부터 놓여나는 과정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의 소멸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유령 C가 사라진 후 카메라는 다시 C와 M이 처음 그 집에 이사 왔던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M은 다시 벽 틈에 쪽지를 숨긴다. 이는 시간의 순환적인 구조와 기억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랑과 상실, 그리고 기다림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유령 C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의 사랑과 기억은 그 집이라는 공간 속에 남아 새로운 형태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삶의 유한함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성찰의 여지를 남긴다.

미니멀리즘 미학: 정적인 프레임, 절제된 감정, 그리고 여백의 힘, 그리고 1.33:1 화면비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고스트 스토리'에서 극도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선보인다. 그는 화려한 시각 효과나 극적인 사건 전개 대신 정적인 프레임과 느린 호흡, 그리고 절제된 감정 표현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한다. 특히 영화 전체에 걸쳐 사용된 1.33:1의 화면 비율(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은 유령 C의 갇힌 듯한 상태와 고독감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며 동시에 오래된 사진이나 초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카메라는 종종 한곳에 고정되어 인물이나 공간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관객이 그 안에 담긴 미세한 감정의 변화나 분위기를 스스로 느끼고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여백의 미학은 관객에게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영화의 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든다.

음악 역시 영화의 미니멀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다니엘 하트의 음악은 대부분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화의 감성적인 깊이를 더하고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C가 생전에 작곡했던 노래는 영화 전체에 걸쳐 변주되며 사랑과 상실, 그리고 그리움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고스트 스토리'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절제되고 응축된 표현 방식을 통해 오히려 더 깊고 강력한 감정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미니멀리즘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결론: 존재의 흔적, 사랑의 영원성, 그리고 시간 너머의 위로와 성찰

'고스트 스토리'는 전통적인 유령 이야기의 관습을 완전히 뒤엎고 사랑과 상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의미라는 보편적이고도 철학적인 주제를 극도로 독창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탐구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이라는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그 너머의 영속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영화는 명확한 해답이나 교훈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미지와 분위기, 그리고 음악을 통해 관객의 감각과 직관에 직접 호소하며 각자 자신만의 의미와 감동을 찾아가도록 안내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그 빈자리를 채우는 기억의 무게, 그리고 시간의 무자비한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다. '고스트 스토리'는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우리 자신의 삶과 관계, 그리고 우리가 남기고 갈 흔적에 대한 깊은 명상의 시간을 선사하는 잊을 수 없는 시적인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