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 북 (Green Book)
감독: 피터 패럴리 | 주연: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 2018
출발점: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남자의 만남
영화 '그린 북'은 1960년대 초, 인종차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미국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두 남자가 예기치 않은 여정을 함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뉴욕의 잘나가는 클럽에서 일하지만 거칠고 단순하며 이탈리아계 특유의 다혈질을 지닌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그는 임시로 일자리를 잃게 되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의 남부 순회공연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 제안을 수락한다. 돈 셜리는 뉴욕 카네기 홀 위층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며 우아하고 지적이며 예술가적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다. 피부색부터 성격, 가치관, 생활 방식까지 모든 것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이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8주간의 여정을 통해 어떻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이해와 우정에 이르는지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감동적인 로드무비다.
여정의 기록: '그린 북' 한 권에 담긴 시대의 아픔
두 사람의 여정에는 '그린 북'이라는 실제 존재했던 흑인 여행객 안내서가 동반된다. 이 작은 책자는 당시 흑인들이 남부 지역을 여행할 때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을 알려주는 생존 지침서와도 같았다. 영화는 이 '그린 북'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돈 셜리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연장에서는 박수갈채를 받지만 식당 출입을 거부당하고, 백인 전용 화장실 사용을 금지당하며,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한다. 토니는 처음에는 이러한 차별에 무감각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돈 셜리가 겪는 모욕과 그의 내면에 숨겨진 깊은 고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돈 셜리를 위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부당한 처사에 함께 분노하며 그의 곁을 지킨다.
'다름'을 마주하는 방식: KFC 치킨과 편지
영화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쾌하게 그려낸다. 예를 들어, 토니는 돈 셜리에게 KFC 치킨을 권하며 손으로 먹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돈 셜리는 토니가 아내에게 보내는 투박한 편지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듬어주며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돕는다. 이러한 소소한 교류들은 처음에는 어색하고 티격태격하지만 점차 서로의 문화와 생각을 존중하고 배우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두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따뜻한 장면들이다.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돈 셜리는 백인 사회에서는 이질적인 존재로 흑인 사회에서는 너무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이유로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안고 있으며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토니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토니 역시 처음에는 돈 셜리의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진솔한 모습과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접하면서 점차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하게 된다. 이들의 여정은 단순히 지리적인 이동을 넘어 서로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편견의 벽을 허무는 과정 그 자체였다.
변화의 선율: 마음을 울리는 우정의 하모니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크리스마스이브,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돈 셜리가 또다시 인종차별적인 대우에 직면하면서 찾아온다. 그는 공연을 거부하고 토니는 그런 그를 지지하며 함께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토니는 돈 셜리를 한 흑인 블루스 클럽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돈 셜리는 격식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진정한 음악적 해방감을 맛본다. 이 장면은 그가 자신을 억압했던 사회적 규범과 내면의 틀을 깨고 나오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토니의 집에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모든 장벽을 넘어 진정한 친구가 되었음을 따뜻하게 확인시켜 준다.
토니 발레롱가: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요, 박사님. 겁먹을 필요 없어요."
돈 셜리: "고마워요, 토니. 당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돈 셜리가 토니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을 표현)
이러한 대화들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진정한 우정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그린 북'은 인종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이는 두 주연 배우의 뛰어난 연기 앙상블 덕분이기도 하다. 비고 모텐슨은 토니 발레롱가 특유의 허풍과 투박함 속에 숨겨진 따뜻한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했으며 마허샬라 알리는 돈 셜리 박사의 우아함과 지성, 그리고 내면의 깊은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호흡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 인물의 여정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고 그들의 감정 변화에 함께 웃고 울게 한다.
영화적 성취: 시대의 재현과 음악의 힘
피터 패럴리 감독은 196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며 영화의 몰입감을 높였다. 의상, 자동차, 거리 풍경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쓴 미장센은 관객을 그 시대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특히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돈 셜리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당시 유행했던 대중음악들은 영화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들고 두 주인공의 감정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악은 때로는 인종과 계급의 벽을 허무는 소통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을 위로하는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촬영 또한 두 인물의 관계 변화와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데 특히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들은 좁은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