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서사를 해체한 기억의 몽타주, 무의식의 흐름 속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감독의 '거울 (Zerkalo / Mirror, 1975)'은 전통적인 영화 문법과 서사 구조를 과감히 해체하고 오직 기억과 꿈, 시적인 이미지와 내레이션의 파편적인 흐름을 통해 한 개인의 내면 풍경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지극히 실험적이고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확한 주인공이나 줄거리를 제시하는 대신 죽음을 앞둔 것으로 암시되는 화자 알렉세이(목소리 출연: 인노켄티 스목투놉스키, Innokenty Smoktunovsky)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의 유년 시절 기억, 어머니 마리아/나탈리아(마르가리타 테레호바, Margarita Terekhova 분)에 대한 애틋하고 복합적인 감정,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Arseny Tarkovsky)의 시, 스페인 내전이나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현재의 단상들이 흑백과 컬러 화면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몽타주된다. '거울'은 단순한 자전적 영화를 넘어 기억의 본질, 시간의 비선형성, 개인사와 집단 역사의 교차, 그리고 예술(특히 시와 영화)을 통한 자기 반영과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심오한 시네마 포엠(Cinema Poem)이다.
비선형적 구조: 기억의 작동 방식, 의식의 흐름을 담다
'거울'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는 비선형적 구조이다. 영화는 논리적인 인과관계나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하고 마치 인간의 기억이나 꿈이 작동하는 방식처럼 연상 작용에 따라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의 기억이 갑자기 현재 아들과의 대화로 이어지고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 현재 아내의 모습과 겹쳐 보이며 역사적인 뉴스릴 필름이 개인적인 회상 장면 사이에 삽입된다. 이러한 파편적인 구조는 관객에게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이며 감정에 의해 채색되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는 기억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능동적인 과정임을 영화의 형식 자체를 통해 증명한다.
흑백과 컬러 화면의 교차 사용 역시 이러한 비선형적 구조와 기억의 본질을 탐구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일반적으로 흑백은 과거를 컬러는 현재를 나타내는 관습적인 방식과 달리 '거울'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때로는 과거의 기억이 생생한 컬러로 재현되고 현재의 장면이 무채색의 흑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기억의 강도나 감정적 중요성에 따라 과거가 현재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시사하며 시간의 객관적인 흐름보다는 주관적인 체험으로서의 시간을 강조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알렉세이라는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 즉 조각난 기억과 감정, 생각의 파편들을 시각화한 거대한 몽타주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라는 거울: 사랑과 죄책감, 세대를 관통하는 이미지
영화의 중심에는 화자 알렉세이의 어머니 마리아(젊은 시절)와 그의 전처 나탈리아(현재)라는 두 인물이 존재하며 이 두 역할을 모두 배우 마르가리타 테레호바가 연기한다. 이는 단순한 1인 2역을 넘어 알렉세이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의 삶과 정체성 형성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은 알렉세이의 기억 속에서 이상화되고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동시에 전쟁과 남편의 부재 속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고통과 희생의 그림자 또한 드리워져 있다. 알렉세이는 어머니에 대해 깊은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녀의 고통에 대한 죄책감과 이해받지 못했다는 원망 등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이미지는 알렉세이의 현재 관계, 특히 전처 나탈리아와의 관계에도 투영된다. 나탈리아의 외모는 젊은 시절 어머니와 놀랍도록 닮았으며 알렉세이는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찾으려 하거나 혹은 어머니와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전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프로이트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과거의 중요한 관계가 현재의 관계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 그리고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인간관계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는 알렉세이에게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며 그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려 시도한다.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울 이미지는 이러한 자기 반영과 정체성 탐구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개인사와 집단 역사: 미시 서사와 거시 서사의 교차와 공명
'거울'은 알렉세이라는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감정을 다루는 동시에 그 기억이 속한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영화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피난민 아이들의 모습, 2차 세계대전 중 군사 훈련 장면, 스탈린 시대의 기록 영상, 중소 국경 분쟁 뉴스릴 등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담은 푸티지(footage)들이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집단 역사의 파편들은 알렉세이 가족의 개인적인 경험 –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고된 삶, 피난 경험 등 – 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명한다. 타르코프스키는 개인의 삶이란 결코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으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고 상처받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전쟁의 이미지는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개인과 가족에게 남긴 깊은 트라우마를 암시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 전쟁이 초래한 세대의 단절과 상실감을 상징한다. 어머니가 인쇄소에서 교정지로 일하며 스탈린의 오타를 발견하고 두려움에 떠는 장면은 개인의 삶을 억압했던 시대적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거울'은 한 개인의 기억을 통해 러시아(소련)의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되짚어보며 개인의 미시 서사(micro-history)와 민족의 거시 서사(macro-history)가 어떻게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지를 성찰한다. 개인의 경험은 역사의 증언이 되고 역사는 개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시적인 영상 언어: 물, 불, 바람, 그리고 자연의 영성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시적인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거울'은 그의 이러한 영상 언어가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영화에는 물, 불, 바람, 나무, 동물 등 자연적인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내면 상태와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물은 기억의 흐름, 시간의 연속성, 정화와 재생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비가 내리는 장면, 천장에서 물이 새는 장면, 물에 젖은 풍경 등은 기억의 촉촉함과 시간의 스며듦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불은 파괴와 소멸의 이미지인 동시에 정화와 열정의 에너지를 상징하며 바람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영적인 기운을 암시한다.
자연 풍경, 특히 시골집 주변의 숲과 들판은 알렉세이의 유년 시절 기억과 결합되어 마치 잃어버린 낙원처럼 그려진다. 그곳은 어머니와의 따뜻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며 현재의 황량함과 대비를 이룬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영적인 차원, 그리고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명상하듯 천천히 움직이며 대상의 질감과 분위기를 포착하고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활용을 통해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겨진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길어 올린다. 이러한 시적인 영상 언어는 관객에게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깊은 정서적, 영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결론: 기억의 심연을 비추는 영화라는 거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은 쉽게 정의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영화적 체험을 제공한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사의 틀을 벗어나 기억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파편적인 구조를 통해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시간의 비선형성, 그리고 기억의 주관적인 본질을 탐구한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개인사와 집단 역사가 교차하고 시적인 이미지와 상징적인 언어가 어우러져 삶과 죽음, 예술과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거울'은 관객에게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도록 초대하는 미로와 같다. 그 미로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명확한 해답 대신 더 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바로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통해 추구했던 것, 즉 관객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거울'의 기능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번 보고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하기보다 여러 번의 감상을 통해 그 풍부한 결을 음미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즐겨야 하는 시대의 위대한 시네마 포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