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축구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감독, 그의 가장 짧고 강렬했던 도전
톰 후퍼 (Tom Hooper) 감독의 '더 댐드 유나이티드 (The Damned United, 2009)'는 1970년대 영국 축구계를 풍미했던 천재적이지만 극도로 오만하고 논쟁적인 축구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 (마이클 쉰, Michael Sheen 분)의 파란만장한 삶,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평생의 라이벌 돈 레비 (콤 미니, Colm Meaney 분) 감독이 이끌던 당대 최강팀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보낸 악몽 같은 44일간의 기록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스포츠 영웅의 성공 신화나 경기 장면의 스펙터클을 쫓는 대신 한 인간의 야망과 질투, 우정과 배신, 그리고 리더십의 본질과 그 한계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날카롭고도 깊이 있게 탐구한다. 데이비드 피스(David Peace)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영화는 클러프의 리즈 시절과 그 이전 더비 카운티 시절의 성공 신화를 교차 편집하며 그의 복잡한 내면과 인간관계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더 댐드 유나이티드'는 축구라는 치열한 경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천재의 오만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성공과 리더십은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강렬하고도 씁쓸한 인간 드라마이다.
브라이언 클러프: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천재성과 자기 파괴적 성향의 경계
영화의 중심에는 브라이언 클러프라는 매혹적이고도 문제적인 인물이 있다. 그는 뛰어난 축구 지능과 카리스마, 그리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하부 리그의 약팀 더비 카운티를 1부 리그 우승팀으로 이끄는 기적을 만들어낸 천재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극단적인 자신감, 타협을 모르는 독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안하무인격의 오만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신을 '최고의 감독'이라 칭하며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고 믿고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특히 그는 당대 최고의 감독이자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돈 레비에 대한 강한 질투심과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는 그의 모든 행동과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이클 쉰은 이러한 브라이언 클러프의 복합적인 캐릭터 – 매력적인 카리스마와 동시에 위험한 자기 파괴적 성향을 지닌 – 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관객이 그의 성공과 실패에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클러프의 오만함은 그가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전임 감독 돈 레비의 업적을 폄하하고 선수들을 "더럽고 비겁하게 우승했다"며 공개적으로 모욕하며 그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바꾸려 한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의 독선적인 태도와 급진적인 변화 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그는 선수단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선수들과의 갈등은 깊어지고 팀의 성적은 곤두박질친다. 이는 그의 천재성이 독선과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과 신뢰 구축에 실패할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성공 방정식에 대한 맹신과 라이벌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를 낳는다.
피터 테일러: 클러프의 그림자이자 분신, 우정과 균열의 드라마
브라이언 클러프의 성공 신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수석 코치였던 피터 테일러 (티모시 스폴, Timothy Spall 분)이다. 테일러는 클러프의 불같은 성격과 독선적인 면모를 보완해주는 침착하고 현실적인 조력자이다. 그는 뛰어난 선수 발굴 능력과 전술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클러프가 놓치는 세부적인 부분들을 챙기고 선수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클러프가 아이디어를 던지고 선수들을 휘어잡는 '쇼맨'이었다면 테일러는 그 뒤에서 묵묵히 팀을 만들어가는 '설계자'였던 셈이다. 영화는 더비 카운티 시절, 클러프와 테일러가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팀을 성공으로 이끄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파트너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클러프의 야망이 커지고 독선적인 행동이 심해지면서 그들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클러프가 더비 카운티 구단주와의 갈등으로 팀을 떠나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으로 옮길 때 테일러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가지만 점차 클러프의 방식에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클러프가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자 테일러는 그와의 동행을 거부하고 결별을 선언한다. 테일러의 부재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클러프가 겪는 처참한 실패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테일러라는 '브레이크'가 없어진 클러프는 더욱 독선적이고 무모하게 행동하며 선수단과 구단 전체의 반발을 산다. 영화는 클러프와 테일러의 관계를 통해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으며 서로를 보완하고 지지해주는 파트너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우정과 균열, 그리고 화해의 과정은 영화의 또 다른 감동적인 축을 이룬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의 44일: 적진에서의 고독한 싸움과 예견된 실패
브라이언 클러프가 돈 레비의 후임으로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도박이자 논란의 시작이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당시 리그를 지배하던 최강팀이었지만 동시에 거칠고 반칙을 일삼는 '더러운 축구'로 악명이 높았고 클러프는 평소 레비와 리즈의 스타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적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장수와 같았다. 그는 리즈 선수들에게 "너희들의 메달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라. 너희들은 정정당당하게 우승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신의 축구 철학을 강요하려 한다. 하지만 돈 레비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똘똘 뭉쳐 있던 리즈 선수들은 새로운 감독의 방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조직적으로 반항한다. 주장 빌리 브렘너(스티븐 그레이엄, Stephen Graham 분)를 비롯한 핵심 선수들은 훈련에 불성실하게 임하거나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며 클러프는 선수단을 장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다.
영화는 클러프가 리즈에서 겪는 고립과 좌절을 심리적으로 깊이 있게 묘사한다. 그는 텅 빈 감독실에서 홀로 술을 마시거나 과거 테일러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괴로워한다. 선수들은 그를 따돌리고, 언론은 그의 실패를 조롱하며, 구단 수뇌부마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벌인다. 결국 리즈 유나이티드는 리그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클러프는 부임한 지 단 44일 만에 경질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44일간의 실패는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상처로 남지만 동시에 그에게 자신의 오만함과 한계를 깨닫고 피터 테일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는 실패가 반드시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라이벌 의식과 자기 증명: 돈 레비라는 거대한 그림자
브라이언 클러프의 삶과 경력에서 돈 레비라는 존재는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이다. 클러프는 레비의 성공을 질투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레비의 축구 스타일을 '더럽고 비겁하다'고 비난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덥석 수락한 것도 어쩌면 레비의 팀을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그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레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그에게 얽매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다.
영화는 클러프와 레비가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나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 그들의 복잡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클러프는 레비를 공격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하지만 오히려 레비의 냉철한 반박과 선수들의 지지 앞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은 클러프가 평생 동안 레비라는 가상의 적과 싸워왔으며 그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레비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그는 레비를 이기고 싶었지만 정작 이겨야 할 대상은 레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오만함과 불안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러한 라이벌 의식이 개인의 성장에 긍정적인 동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과도한 집착과 왜곡된 자기 인식으로 이어져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 오만과 회한, 그리고 화해를 통한 인간적 성장, 축구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
'더 댐드 유나이티드'는 단순한 축구 영화를 넘어 한 천재적인 인물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성장을 깊이 있게 그린 뛰어난 드라마다. 톰 후퍼 감독은 브라이언 클러프라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물을 미화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그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감 있게 담아내며 관객 스스로 그를 판단하도록 이끈다. 마이클 쉰의 압도적인 연기는 클러프의 카리스마와 오만함, 그리고 내면의 불안감과 외로움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며 영화에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축구 감독이라는 특수한 직업의 세계를 통해 야망과 질투, 우정과 배신, 리더십과 소통,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의미 등 보편적인 인간관계와 삶의 문제들을 성찰하게 한다. 브라이언 클러프의 44일간의 처참한 실패는 그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가장 소중한 파트너였던 피터 테일러와 화해하며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결국 축구도, 인생도, 혼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진정한 성공은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더 댐드 유나이티드'는 씁쓸하지만 깊은 여운으로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