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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이더': 부서진 안장 위, 카우보이 정신의 재정의

by reward100 2025. 5. 8.

 

Film, The Rider, 2017

서론: 로데오의 먼지 속, 현대 카우보이의 초상과 실존적 고뇌

클로이 자오 (Chloé Zhao) 감독의 '더 라이더 (The Rider, 2017)'는 전통적인 서부극의 신화와 화려한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현대 미국 사우스다코타의 황량한 배드랜즈를 배경으로 한 젊은 로데오 카우보이의 내면 풍경과 실존적 고뇌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 브래디 블랙번(브래디 잰드로, Brady Jandreau 분)을 비롯한 대부분의 출연진이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로데오 카우보이들이며 그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사실주의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은 이야기에 강력한 진정성을 부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브래디의 고통과 갈망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로데오 경기 중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브래디가 겪는 정체성의 위기, 꿈의 좌절, 그리고 남성성, 가족,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더 라이더'는 클로이 자오 감독 특유의 시적인 영상미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통해 부서진 꿈 위에서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 영혼의 아름답고도 처절한 초상을 그려낸다.

브래디 블랙번: 잃어버린 정체성, 카우보이라는 이름의 굴레

영화의 중심에는 젊은 로데오 스타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선수 생명에 치명적인 위기를 맞은 브래디 블랙번이 있다. 그에게 로데오는 단순한 스포츠나 직업이 아니라 그의 삶 그 자체이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말과 교감하고 거친 야생마를 길들이며 경기장에서 환호를 받는 것은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머리 부상으로 인해 의사로부터 다시 말을 타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한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그는 손에서 느껴지는 말의 근육 떨림, 안장 위에서의 자유로움, 그리고 관중의 함성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로데오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하지만 동시에 재활의 고통,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들과도 마주해야 한다.

브래디의 내적 갈등은 '카우보이'라는 전통적인 남성성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카우보이는 강인함, 용기, 독립심의 상징이며 말을 타지 못하는 카우보이는 더 이상 카우보이로서 인정받기 어렵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 즉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는 여전히 말을 길들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지만 그것이 더 이상 로데오 경기장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좌절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브래디의 내면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한 개인이 자신의 꿈과 정체성이 외부적인 요인(사고)에 의해 산산조각 났을 때 겪게 되는 심리적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미련과 현재의 절망,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말과의 교감: 자연과의 합일, 상실과 치유의 매개체

'더 라이더'에서 말은 단순한 동물을 넘어 브래디의 삶과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중요한 상징적 존재이다. 그는 말과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며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그들을 대한다. 특히 그가 아끼던 말 아폴로와의 관계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아폴로 역시 다리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경주마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안락사 위기에 처하는데 이는 브래디 자신의 처지와 겹쳐지며 그에게 깊은 슬픔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브래디가 아픈 아폴로를 정성껏 돌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려는 모습은 그가 상실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야생마를 길들이는 장면들은 브래디가 가진 타고난 재능과 말과의 깊은 교감 능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로데오를 통해 추구했던 자연과의 합일, 그리고 위험 속에서의 짜릿한 자유를 암시한다.

하지만 말은 그에게 위안과 치유의 대상인 동시에 끊임없이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좌절을 상기시키는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는 말을 볼 때마다 다시 안장 위에 오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져올 위험을 알기에 괴로워한다. 영화는 브래디와 말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는 말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현재의 고통을 치유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는다. 말은 그에게 잃어버린 꿈의 상징이자 동시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희망의 매개체인 것이다.

가족과 공동체: 현실적인 삶의 무게와 따뜻한 연대의 힘

영화는 브래디 개인의 고뇌와 함께 그가 속한 가족과 공동체의 현실적인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는 도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지적 장애를 가진 여동생 릴리는 브래디의 따뜻한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로데오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던 브래디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게 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마트 계산원과 같은 평범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마주한다. 이는 화려한 로데오 스타의 이면에 숨겨진 현대 미국 서부 노동자 계층의 고단한 삶과 경제적 불안정성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따뜻한 연대의 힘을 강조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로데오 복귀를 만류하고 여동생 릴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오빠를 응원한다. 로데오 경기장에서 만난 친구들 역시 브래디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에게 힘이 되어주려 노력한다. 특히 브래디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재활 중인 친구 레인 스콧(레인 스콧, Lane Scott 분)과의 만남은 브래디에게 큰 위안과 용기를 준다. 레인은 전신 마비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브래디에게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진정한 남성성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강인함이나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책임감,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내면의 강인함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클로이 자오의 시선: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시적 영상미의 조화

클로이 자오 감독은 '더 라이더'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주의와 시적인 영상미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선보인다. 실제 인물들을 캐스팅하고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영화는 꾸며낸 드라마가 아니라 마치 실제 삶의 한 단면을 엿보는 듯한 강한 현실감을 자아낸다.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은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으며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상처는 그들이 겪어온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접근은 관객이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진정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클로이 자오는 사우스다코타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시적인 영상으로 담아내며 영화에 깊은 서정성을 부여한다. 해 질 녘 황금빛으로 물든 초원, 말을 타고 달리는 브래디의 역동적인 모습, 밤하늘의 별과 모닥불 등 자연의 이미지는 브래디의 내면 풍경과 조응하며 그의 고독과 갈망, 그리고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브래디가 말과 교감하는 장면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지며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전달한다. 이러한 시적인 영상미는 영화의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브래디의 이야기에 보편적인 감동과 희망의 여운을 더한다.

결론: 부서진 꿈 너머,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용기

'더 라이더'는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특정 직업군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꿈의 좌절과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한 젊은이의 고통스러운 성장 과정을 따뜻하고도 예리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진정한 용기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브래디 블랙번은 결국 로데오 경기장으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그는 말과 교감하는 자신의 재능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그가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상실의 아픔을 끌어안고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불완전함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더 라이더'는 화려한 서부극의 신화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평범하지만 강인한 한 인간의 진솔한 초상을 세우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