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The Father (2020) -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

기억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현실은 조각난 거울처럼 일그러진다. 플로리앙 젤레르의 '더 파더'는 단순한 질병의 기록을 넘어 한 인간의 존엄성이 시간의 파도 앞에서 어떻게 부서지고 또 어떻게 희미하게 빛나는지를 처절하게 그러나 깊은 연민으로 응시하는 영화적 미로이다. 우리는 앤서니의 눈을 통해 그의 시간을 함께 앓는다.
하나. 낯선 집, 낯선 얼굴들: 여기가 정말 나의 공간인가?
영화는 대부분 앤서니(앤서니 홉킨스 분)가 거주하는 런던의 아파트를 주 무대로 삼지만 이 공간은 결코 관객에게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가구의 배치가 예고 없이 바뀌고 벽의 색감이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마저 미묘하게 혹은 확연히 달라진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인물들의 변화이다.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이라고 믿었던 여성의 얼굴이 어느 순간 낯선 이(올리비아 윌리엄스 분)로 변해 있거나 앤의 남편이라고 소개받은 남자가 두 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과 인물의 불일치, 그리고 시간의 뒤엉킴은 치매를 앓고 있는 앤서니가 경험하는 현실 인식의 극심한 혼란과 기억의 왜곡을 관객이 그의 시점에서 직접 체험하도록 만드는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의 정교한 연출 전략이다. 우리는 앤서니와 함께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의 왜곡된 지각인지 현재가 언제이고 과거의 기억이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안락해야 할 집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낯선 타인들이 불쑥 침입하고 자신의 소중한 물건(특히 시계)이 사라지는 불안하고 위협적인 공간, 즉 그의 무너져 내리는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미로와 같은 장소로 변모한다.
시간의 흐름 역시 전통적인 영화 서사의 선형성을 거부한다. 영화는 명확한 시간적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사건,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뒤섞여 마치 꿈처럼 제시된다. 앤이 파리로 떠난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반복되지만 그 상황이나 시점은 매번 다르게 나타나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새로 온 간병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언제부터 함께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게 뒤엉켜 있으며 앤서니는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지금이 며칠인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맞이한다. 이러한 시간의 파편화와 뒤틀림은 치매 환자가 겪는 기억 상실과 시간 감각의 왜곡을 스크린 위에 생생하게 재현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깊은 불안과 실존적 공포에 감정적으로 동참하게 만든다.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은 자신의 동명 연극을 영화로 옮기면서, 연극 무대의 한정된 공간이라는 제약을 오히려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확장시켜 한 인간의 내면 풍경과 그 붕괴 과정을 시각화하는 독창적이고도 충격적인 미장센을 구축해냈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앤서니의 정신 그 자체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혼란과 변화는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싸움의 외적인 표현이다.
둘. 앤서니의 시선: 의심, 분노, 그리고 잃어버린 잎사귀들
"내 시계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사소한 집착이 말해주는 것
앤서니는 영화 내내 자신의 손목시계를 강박적으로 찾는다. 시계는 그에게 단순한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유일한 닻과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시계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그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 특히 딸 앤이나 간병인을 의심하며 분노를 터뜨린다. 이는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와 저항을 반영한다. 그는 간병인이나 딸 앤이 자신의 시계를 훔쳤다고 확신하며 그들을 몰아세우지만 정작 시계는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발견되거나 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이 사소해 보이는 집착은 그의 기억이 얼마나 파편화되고 신뢰할 수 없는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가는 것에 대한 그의 처절하고도 슬픈 저항을 상징한다. 시계는 그에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지만 그 끈마저도 그의 손아귀에서 끊임없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반복되는 시계 찾기는 그의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마지막 질서를 부여잡으려는 안간힘이다.
앤서니: "내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가지들도. 바람도, 비도.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보고 싶어."
이 가슴 아픈 대사는 영화의 후반부, 모든 기억과 현실 감각을 거의 상실해버린 앤서니가 어린아이처럼 울며 새로 온 간병인에게 자신의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토로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을 잎사귀가 다 떨어져 버린 앙상한 나무에 비유하며 삶의 모든 의미와 연결고리가 하나씩 사라져가는 극심한 고통과 상실감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한때 위엄 있고 지적이었으며 유머 감각까지 갖췄던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조차 희미해진 채 어린 시절의 엄마를 찾으며 우는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변해버렸다. 앤서니 홉킨스는 이러한 앤서니의 점진적이면서도 가혹한 정신적 붕괴 과정을 숨 막힐 듯한 경이로운 연기력으로 소화해내며 관객에게 치매라는 질병의 잔혹함과 그로 인해 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지를 뼈저리게 전달한다. 그의 연기는 단순한 캐릭터 묘사를 넘어 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실존적 절규와 같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취약성에 대한 성찰을 안겨준다.
앤, 그녀의 사랑은 부담이었을까, 마지막 온기였을까?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은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점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자신의 새로운 삶(파리로의 이주)과 병든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겪는다. 그녀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최대한 미루며 최선을 다해 그를 집에서 돌보려 하지만 앤서니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망상, 그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언사는 그녀에게 큰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안겨준다. 앤서니는 때로는 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다른 딸 루시와 혼동하며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또한, 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그녀의 파리행 계획을 이기적이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앤에게 깊은 상처와 함께 떨쳐낼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겨주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쓴다. 올리비아 콜맨은 이러한 앤의 복잡하고 힘겨운 감정 – 사랑, 책임감, 죄책감, 분노, 슬픔, 그리고 체념 – 을 섬세하고 절제된, 그러나 폭발적인 내면 연기로 표현하며 관객이 그녀의 고통과 딜레마에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앤서니와 앤의 관계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이 현실에서 겪게 되는 극심한 어려움과 감정적인 소모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러나 결코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게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점차 자신을 잃어가고 과거의 기억 속에 잠식당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며 그 과정에서 사랑과 의무감, 죄책감과 분노, 연민과 절망 등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격렬하게 교차한다. 영화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거나 쉬운 해결책, 혹은 값싼 위로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처한 상황의 피할 수 없는 무게와 그 안에서 각자가 느끼는 감정의 진실성을 존중하며, 관객 스스로 이들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윤리적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앤이 결국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눈물을 삼키는 장면은 그녀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한계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며 깊은 안타까움과 함께 복잡한 여운을 남긴다. 이는 '돌봄'이라는 행위의 윤리적 무게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확장된다.
셋. 영화적 언어의 정교함: 주관적 현실의 시각화, 관객을 미로에 가두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시점과 반복되는 미장센의 변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기억의 잔상인가?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은 '더 파더'에서 앤서니라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의 시점을 영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관객이 그의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현실 인식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정교하게 설계한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인물들을 오직 앤서니의 불안정한 눈과 귀, 그리고 뒤섞인 기억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며 그의 기억과 지각이 왜곡됨에 따라 우리가 보고 듣는 현실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진위가 의심받게 된다. 동일한 공간(앤서니의 아파트, 혹은 앤의 아파트, 혹은 요양원의 방)에서 동일한 인물(딸 앤, 간병인 로라, 앤의 남편 혹은 전남편 폴 등)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외모나 역할,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매 순간, 혹은 매 장면마다 미묘하게 혹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과 변주는 마치 잘 짜인 연극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서로 다른 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앤서니의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여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과 인물들이 현재의 시공간에 무질서하게 중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명확한 시간적, 공간적 단서나 객관적인 시점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앤서니의 혼란스러운 정신세계라는 이름의 미로 속에 가두고 그가 느끼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정체성의 상실감을 공유하게 만든다. 이는 치매라는 질병의 본질, 즉 현실 감각과 기억의 점진적인 붕괴 과정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매우 독창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이며 관객에게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선 체험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영화는 또한 사운드 디자인과 편집 기법을 통해 앤서니의 주관적인 경험과 심리 상태를 더욱 강화한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문밖의 소음이나 왜곡된 듯한 주변의 소리들은 그의 불안정하고 편집증적인 심리 상태를 청각적으로 반영하며 장면 전환은 종종 논리적인 연결고리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져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앤서니가 그토록 아끼고 좋아하는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로맨스 아리아 "신성한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는 그의 과거 행복했던 기억과 연결되는 중요한 정서적 모티프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그 아름다운 음악마저도 불안정하게 끊기거나 왜곡되어 그의 내면의 혼란과 상실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정교하게 계산된 영화적 장치들은 단순한 기술적인 기교를 넘어 치매 환자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지를 관객에게 감각적이고도 정서적으로 전달하려는 감독의 섬세하고도 집요한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 파더'는 관객에게 편안한 감상이나 명쾌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추고 진실을 추리하도록 끊임없이 유도하지만 그 어떤 추리도 결국 불확실함과 모호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는 치매라는 질병이 가진 예측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깊은 절망감을 관객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하는 강력하고도 독창적인 영화적 효과를 가진다.
넷. 마지막 잎새: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
플로리앙 젤레르의 '더 파더'는 치매라는 질병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취약성과 상실의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인간적인 연결에 대한 갈망을 탐구하는 지독하게 슬프지만 동시에 깊은 인간적인 울림과 성찰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앤서니 홉킨스의 경이롭고도 압도적인 연기는 한 인간이 자신의 소중한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현실 감각을 속절없이 잃어가는 과정을 처절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영화는 명확한 해결책이나 값싼 위로, 혹은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무너져 내리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의 기억(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딸 앤에 대한 복합적인 애정)과 인간적인 연결에 대한 희미한 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져갈 때조차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인간 존엄성의 가치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앤서니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내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 가지들도. 바람도, 비도.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모습은 한때 강인하고 지적이었던 한 인간이 시간과 질병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가슴 아프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함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강조한다.
'더 파더'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길을 잃어갈 때 그의 마지막 남은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지막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이 영화는 치매라는 질병을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이나 의학적인 문제로만 그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가족 관계의 본질, 돌봄 노동의 윤리적 무게,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보편적이고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앤서니의 공허한 눈빛과 슬픈 절규,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잎새를 향한 애처로운 갈망은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잔상으로 남아 삶의 유한성과 그 안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잊을 수 없는 강렬하고도 슬픈 영화적 경험이다. 그의 잎사귀는 떨어졌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기억의 흔적,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상실의 풍경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삶과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