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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이버릿(The Favourite, 2018): 권력, 욕망, 그리고 생존의 궁정 서사시

by reward100 2025. 6. 1.
The Favourite, 2018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 주연: 올리비아 콜맨, 엠마 스톤, 레이첼 와이즈 | 2018

I. 궁정의 무대: 뒤틀린 욕망이 교차하는 곳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18세기 초 영국,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 분)의 통치 아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펼쳐지는 세 여성의 치밀하고도 처절한 권력 암투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감독 특유의 기괴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물들의 뒤틀린 욕망과 심리, 그리고 궁정 생활의 허위와 위선을 파헤친다. 전쟁이 계속되고 정치적 파벌 싸움이 극심했던 시기, 건강이 좋지 않고 변덕스러운 앤 여왕의 총애는 곧 절대적인 권력을 의미했다. 이 아슬아슬한 권력의 중심에는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실질적인 조언자 역할을 하는 레이디 사라 처칠(레이첼 와이즈 분)이 있었고 몰락한 귀족 가문의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 분)이 하녀로 궁에 들어오면서 세 여인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이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인간 본성에 내재된 권력욕과 생존 본능, 그리고 사랑과 질투, 배신과 복수라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독창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탐구한다.

II. 세 여인, 세 개의 야망: 캐릭터 분석

앤 여왕: 연약함과 폭력성이 공존하는 권력의 정점

올리비아 콜맨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앤 여왕 캐릭터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통풍으로 고통받고 17명의 자녀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으며 국사보다는 토끼 기르기에 더 열중하는 유약한 군주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변덕에 따라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애정과 잔혹함을 동시에 보이는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연약함은 타인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그 의존은 곧 총애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궁정 내 권력 투쟁의 빌미를 제공한다. 올리비아 콜맨은 앤 여왕의 육체적 고통, 정신적 불안정,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권력자로서의 고독과 변덕스러움을 신들린 듯한 연기로 표현해낸다.

레이디 사라: 이성과 냉철함으로 무장한 책략가

레이첼 와이즈가 연기한 레이디 사라는 앤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조언자로서 궁정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녀는 뛰어난 지성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때로는 여왕에게 직설적인 충고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여왕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남편의 군사 활동을 지원하는 등 철저히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애비게일의 등장으로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자 그녀는 특유의 냉정함과 치밀함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려 하지만 결국 감정적인 허점을 드러내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레이첼 와이즈는 사라의 지적인 매력과 차가운 카리스마,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감정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애비게일 힐: 순진한 얼굴 뒤에 숨겨진 야심가

엠마 스톤이 연기한 애비게일 힐은 영화의 초반 순수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야심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하녀로 시작한 그녀는 특유의 눈치와 처세술, 그리고 때로는 비열한 계략을 통해 점차 여왕의 신임을 얻고 사라의 자리를 위협한다. 그녀의 변화는 궁정이라는 폐쇄적이고 경쟁적인 환경이 개인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엠마 스톤은 순진무구함과 교활함을 넘나드는 입체적인 연기로 애비게일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III. 란티모스적 세계: 기괴함과 아름다움의 미학

'더 페이버릿'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특유의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는 광각 렌즈와 어안 렌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물들이 처한 공간을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불안정한 심리와 뒤틀린 관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과 촛불 조명은 고전적인 시대극의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인물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통해 그들의 어두운 내면을 암시한다. 또한, 영화 전반에 흐르는 바로크 음악과 함께 때때로 삽입되는 현대적이거나 불협화음 같은 사운드는 시대극의 관습을 깨고 영화에 독특한 리듬감과 긴장감을 부여한다.

감독의 인장: 란티모스 감독은 종종 무표정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 그리고 갑작스럽고 기괴한 유머를 통해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허위의식을 풍자한다. '더 페이버릿'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여실히 드러나며 화려한 궁정 생활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동물적인 생존 본능을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오리 경주, 과일 던지기, 기괴한 춤사위 등은 이러한 부조리함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영화의 의상과 미술 또한 주목할 만하다. 샌디 파웰의 의상은 각 캐릭터의 성격과 심리 변화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며 궁정의 화려함과 퇴폐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담아낸다. 흑백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특정 색깔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나 상황을 암시하는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라의 의상은 주로 강인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애비게일의 의상은 처음에는 소박하지만 점차 화려하고 과장된 형태로 변해간다.

IV. 권력의 속성: 달콤한 독배와 허무한 종말

'더 페이버릿'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고 고립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앤 여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지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감 속에서 진정한 위안을 찾지 못하고 타인에게 휘둘린다. 레이디 사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냉철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결국 감정적인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애비게일은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권력의 맛을 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결국 여왕의 변덕에 희생되는 또 다른 토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영화는 권력이란 결국 일시적이고 허무한 것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 큰 것을 잃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권력이란 속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게 되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본인에게 독배가 될 것이고 국민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 후대에 칭송을 받게 된다. 중요한 것은 특히 현대 민주주의 권력을 개인 사유화하면 절대 안되고 권력은 국민이 일시적으로 위임한 것임을 항상 가슴속에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주제를 강렬하게 요약한다. 애비게일은 마침내 사라를 몰아내고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듯 보이지만 여왕은 병상에서 그녀에게 굴욕적인 행동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이 장면 위로 수많은 토끼들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궁정 내의 모든 인물들이 결국 여왕의 변덕스러운 애정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 갇힌 나약한 존재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권력 게임의 허무함과 인간 존재의 고독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에필로그: 우아한 잔혹극, 혹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관습적인 시대극의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만의 독창적인 스타일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속성을 탐구한 수작이다. 세 여배우의 압도적인 연기 앙상블과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한 미장센,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블랙 코미디는 관객에게 지적이고도 강렬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적 재현을 넘어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인간의 욕망과 관계의 역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어떤 달콤한 위로나 명쾌한 해답 대신 씁쓸하지만 곱씹을수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