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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트": 종이와 잉크, 활자와 인쇄기 - 진실의 물질성에 관한 연대기

by reward100 2025. 4. 19.

 

Film, The Post, 2017

펜타곤 페이퍼스, 만질 수 있는 진실의 무게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2017년 작은 1971년 미국을 배경으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담은 국방부 기밀문서, 일명 '펜타곤 페이퍼스'의 폭로 과정을 긴박하게 그린다.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케이' 그레이엄(Meryl Streep)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Tom Hanks)는 뉴욕 타임스가 정부의 압력으로 보도를 중단당한 후 이 위험천만한 문서를 손에 넣고 보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는 흔히 언론 자유의 중요성이나 여성 리더십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해석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다른 각도, 즉 '진실의 물질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더 포스트>는 추상적인 '진실'이나 '자유'가 아니라 실제 만져지는 종이 뭉치, 타이핑되는 활자, 돌아가는 인쇄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리적인 땀과 위험을 통해 그 시대 언론의 사명과 고뇌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영화는 펜타곤 페이퍼스가 어떻게 유출되고(대니얼 엘즈버그 역의 Matthew Rhys) 전달되는지 그 육중한 서류 더미가 어떻게 편집국으로 옮겨지고 기자들의 손으로 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디지털 파일 복사-붙여넣기가 아닌 직접 복사하고, 운반하고, 분류해야 하는 종이 문서의 물리적 무게감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의 무게와 그것을 다루는 이들의 책임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진실은 클라우드 속에 존재하는 데이터가 아니라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만질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위험한 '물건'이다.

뉴스룸의 교향곡: 타이프라이터와 전화벨 소리, 잉크 냄새

영화는 1970년대 워싱턴 포스트 뉴스룸의 풍경을 탁월하게 재현한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기자들의 고함, 그리고 무엇보다 수십 대의 타이프라이터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타닥거리는 소리의 교향곡. 이 아날로그적인 소음들은 디지털 시대의 고요한 사무실과는 다른 긴박하고 역동적인 저널리즘의 현장을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벤 브래들리가 지휘하는 편집국은 열정과 혼돈이 뒤섞인 공간이다.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기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진실을 향해 돌진한다.

반면, 케이 그레이엄의 공간은 주로 고급 레스토랑, 사교 모임 장소, 그리고 중역 회의실이다.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 속에서 그녀는 늘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때로는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펜타곤 페이퍼스라는 '물리적' 사건은 이 두 세계를 충돌시키고 연결한다. 특히 벤 배그디키언(Bob Odenkirk) 기자가 산더미 같은 문서를 구해와 브래들리의 집 거실 바닥에 펼쳐놓고 기자들이 밤새워 퍼즐 맞추듯 기사를 작성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진실을 '조립'하는 과정의 물리적인 고됨과 희열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것은 클릭 몇 번으로 정보가 유통되는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아날로그적 투쟁이다.

인쇄기의 함성: 진실을 찍어내는 위험과 연대

기사가 완성되고 마침내 인쇄에 들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다. 편집국에서 조판실로 원고가 넘어가고 숙련된 기술자들이 일일이 납 활자를 배열하여 판을 짜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윤전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은 단순한 신문 제작 과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정부의 압력과 법적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언론사의 결단이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이다. 브래들리의 신념은 이 과정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벤 브래들리: "The only way to assert the right to publish is to publish." (보도할 권리를 주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도하는 것이다.)

인쇄기가 뿜어내는 잉크 냄새와 종이의 질감, 기계의 굉음은 단순한 시청각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을 '찍어내는' 행위 자체에 내재된 위험과 책임감,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연대를 상징한다. 완성된 신문 뭉치가 트럭에 실려 새벽 거리를 달리는 장면은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진실'이 어떻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시각적 은유다. 이 아날로그적 과정의 육중함은 디지털 시대의 정보 유통 방식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감과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서류 더미 위의 결단: 캐서린 그레이엄의 성장과 무게

메릴 스트립이 섬세하게 그려낸 케이 그레이엄의 여정 역시 '물질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신문사라는 거대한 물리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오랫동안 실질적인 경영에서는 소외되어 있었다. 영화 초반, 그녀는 회사의 기업 공개(IPO)를 앞두고 재무 서류와 투자자들 앞에서 불안해하며 남성 이사들(프리츠 비비 - Tracy Letts, 아서 파슨스 - Bradley Whitford 등)의 눈치를 살핀다. 신문사는 그녀에게 자랑스러운 가업이자 동시에 버거운 책임감이다.

펜타곤 페이퍼스라는 예상치 못한 '물질적' 사건은 그녀를 결단의 순간으로 내몬다. 그녀는 밤늦게 걸려오는 여러 통의 전화를 통해 각기 다른 압박과 조언을 받는다. 오랜 친구이자 전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Bruce Greenwood)의 회유와 은근한 협박, 이사진과 변호사들의 경영상의 위험 경고, 그리고 편집국장 브래들리의 보도 강행 의지 사이에서 그녀는 고뇌한다. 이 모든 통화는 유선 전화라는 물리적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지며 보이지 않는 연결과 단절의 긴장감을 더한다. 마침내 그녀가 수화기를 들고 내리는 결정은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다. 그것은 신문사라는 기업, 가족의 유산,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물리적인 결과를 감수하는 행위다. 비비의 경고처럼 정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워싱턴 포스트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프리츠 비비: "If the government wins, The Washington Post as we know it will cease to exist." (만약 정부가 이기면 우리가 아는 워싱턴 포스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요.)
케이 그레이엄: "Well, I don't think I could ever live with myself if I didn't publish." (글쎄요, 만약 보도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을 보며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 "My decision stands, and I'm going to bed." (제 결정은 확고해요, 이제 자러 가겠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결정과 단호한 목소리는 서류 더미와 남성들의 의심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와 위치를 찾은 리더의 탄생을 알린다.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런 무게감을 갖고 있는 언론사 사주나 언론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종이에서 역사로: 아날로그 시대의 기록 정신

<더 포스트>는 결국 1970년대라는 아날로그 시대의 저널리즘이 가진 물리적 특성을 통해 언론 자유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산더미 같은 비밀 문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타이프라이터, 밤샘 작업으로 지친 기자들의 모습, 새벽을 가르며 인쇄소로 향하는 원고, 그리고 마침내 잉크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나오는 신문. 이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위험하며 또한 가치 있는 노동이었는지를 웅변한다.

스필버그 감독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시대의 '물질성' 자체를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그는 디지털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실'의 무게와 그것을 다루는 언론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더 포스트>는 자유 언론의 가치를 되새기는 동시에 종이와 잉크, 그리고 인간의 땀으로 쓰여진 저널리즘의 역사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마지막, 워터게이트 사건을 암시하며 끝나는 장면은 이러한 언론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록된 진실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마무리다.

대한민국 저널리즘이 진실의 무게와 언론의 책임감을 되새기고 새롭게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주요 등장인물 및 배우

  • 캐서린 '케이' 그레이엄 (Katharine "Kay" Graham) - Meryl Streep (메릴 스트립)
  • 벤 브래들리 (Ben Bradlee) - Tom Hanks (톰 행크스)
  • 벤 배그디키언 (Ben Bagdikian) - Bob Odenkirk (밥 오든커크)
  • 프리츠 비비 (Fritz Beebe) - Tracy Letts (트레이시 레츠)
  • 아서 파슨스 (Arthur Parsons) - Bradley Whitford (브래들리 휫퍼드)
  •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 Bruce Greenwood (브루스 그린우드)
  • 대니얼 엘즈버그 (Daniel Ellsberg) - Matthew Rhys (매슈 리스)
  • 토니 브래들리 (Tony Bradlee) - Sarah Paulson (세라 폴슨)
  • 랠리 그레이엄 웨이머스 (Lally Graham Weymouth) - Alison Brie (앨리슨 브리)
  • 멕 그린필드 (Meg Greenfield) - Carrie Coon (캐리 쿤)
  • 하워드 시몬스 (Howard Simons) - David Cross (데이비드 크로스)
  • 로저 클라크 (Roger Clark) - Jessie Mueller (제시 뮬러)
  • 앤서니 에세이 (Anthony Essaye) - Zach Woods (잭 우즈)
  • 에이브 로즌솔 (Abe Rosenthal) - Michael Stuhlbarg (마이클 스툴바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