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사 대신 감각: 전쟁의 피부적 체험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7년 작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의 외피를 썼지만 그 내부는 전통적인 서사와는 완전히 다른 물질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는 영웅담이나 반전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1940년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의 감각적 경험 자체를 스크린 위에 조각한다. 놀란은 관객을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에 앉히는 대신 해변의 모래바람, 전투기의 굉음,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무자비하게 끌어당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배경 설명이나 심리 묘사를 최소화한다. 토미(Fionn Whitehead)라는 이름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젊은 병사는 특정한 개인이기보다 생존이라는 원초적 본능만이 남은 익명의 존재를 대변한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된 광활한 해변과 그 위를 무력하게 뒤덮은 군인들의 모습, 한스 짐머(Hans Zimmer)의 끊임없이 압박하는 사운드 디자인(특히 '셰퍼드 음' 기법과 시계 초침 소리)은 논리적 이해가 아닌 생리적 반응을 유도한다. 관객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 인물들과 함께 숨 막히는 압박감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포를 '체험'하게 된다.
해체된 시간, 증폭되는 긴장: 놀란의 시간 실험
<덩케르크>의 가장 대담한 시도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놀란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개의 다른 시점과 시간대—해변에서의 일주일(The Mole: One Week), 바다에서의 하루(The Sea: One Day), 하늘에서의 한 시간(The Air: One Hour)—로 분절하고 이를 교차 편집한다. 이는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는 핵심적인 구조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시간의 상대성, 즉 어떤 이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다른 이에게는 찰나일 수 있다는 주관적 시간의 경험을 영화적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 세 개의 시간대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해변에서 일주일을 버티는 병사들의 절박함, 하루 동안 그들을 구하러 오는 민간 선박의 항해,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제공권을 지키려는 전투기 조종사의 사투가 교차되면서 관객은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동시에 고조되는 위기감을 느낀다. 놀란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배열하는 대신 감정적, 상황적 강도에 따라 시간을 압축하고 팽창시키며 이를 통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본질—압도적인 혼돈 속에서의 필사적인 생존 투쟁을 감각적으로 체화시킨다.
얼굴 없는 군상: 개인과 집단의 생존 분투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조차 희미하다. 토미, 그와 함께 다니는 알렉스(Harry Styles), 침묵 속에 비밀을 간직한 듯한 깁슨(Aneurin Barnard) 등 해변의 병사들은 개별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들은 거대한 전쟁 기계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평범하고 나약한 개인들의 집합체다. 그들의 목표는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오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두의 끝에서 망연히 수평선을 바라보는 볼튼 사령관(Kenneth Branagh)의 대사는 이들의 염원을 함축한다.
"What?" (뭐가 말입니까?)
"Home." (집.)
반면, 바다 위에서는 다른 종류의 인간 군상이 그려진다. 아들을 잃을지도 모르는 전쟁에 기꺼이 뛰어든 민간 선박 주인 도슨 씨(Mark Rylance)와 그의 아들 피터(Tom Glynn-Carney), 그리고 어린 조수 조지(Barry Keoghan). 이들은 개인적인 용기와 희생을 통해 집단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도슨 씨의 대사는 전쟁의 책임과 참여의 의미를 되묻는다.
한편, 구조된 배 위에서 극도의 불안과 트라우마를 보이는 떨고 있는 병사(Cillian Murphy)는 전쟁이 개인의 영혼에 남기는 깊은 상흔을 대변한다. 그의 존재는 생존 너머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를 상기시킨다.
침묵의 언어, 행동의 서사
<덩케르크>는 극도로 대사를 절제한다. 인물들은 상황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행동하고 반응한다. 해변에서 폭격을 피해 엎드리는 몸짓,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연료가 간당간당한 전투기 안에서 고독하게 싸우는 조종사(파리어 역의 Tom Hardy)의 침묵은 그 어떤 대사보다 강력하게 상황의 긴박함과 인물의 감정을 전달한다.
드물게 등장하는 대사들은 대부분 상황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단편적인 외침이거나 기능적인 교신이다. 해변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병사의 외침("Where's the bloody air force?" - 빌어먹을 공군은 어디 있는 거야?), 구조선 안에서의 갈등("He's not gonna make it." - 그는 틀렸어. / "Turn the ship around!" - 배 돌려! / "We're going home!" - 우린 집에 가는 거야!) 등은 생존과 절망, 이기심과 의무감이 충돌하는 극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놀란은 언어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오직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서사를 직조해 나간다.
체험을 넘어서: <덩케르크>가 남긴 것
<덩케르크>는 단순한 감각적 체험을 넘어선다. 놀란은 시간과 공간을 조작하고 감각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그 속에서도 발현되는 인간의 생존 본능, 그리고 집단적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영화는 전쟁을 미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혼돈과 공포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 구조되어 돌아온 토미가 기차 안에서 처칠의 연설문을 읽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격문은 영화 내내 관객이 온몸으로 체험한 생존의 공포와 무게위에서 읽힐 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그 연설이 현실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이름 없는 개인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뒤늦은 각주처럼 느껴진다. <덩케르크>는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만듦으로써 전쟁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화 관람을 넘어선 강렬하고 불편하며 동시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적 체험이다.
주요 등장인물/상황 및 배우
- 토미 (Tommy) - Fionn Whitehead (핀 화이트헤드)
- 파리어 (Farrier - 파일럿) - Tom Hardy (톰 하디)
- 떨고 있는 병사 (Shivering Soldier) - Cillian Murphy (킬리언 머피)
- 도슨 씨 (Mr. Dawson - 민간 선장) - Mark Rylance (마크 라이런스)
- 볼튼 사령관 (Commander Bolton) - Kenneth Branagh (케네스 브래너)
- 알렉스 (Alex) - Harry Styles (해리 스타일스)
- 피터 (Peter - 도슨의 아들) - Tom Glynn-Carney (톰 글린카니)
- 조지 (George) - Barry Keoghan (배리 케오건)
- 위넌트 대령 (Colonel Winnant) - James D'Arcy (제임스 다시)
- 깁슨 (Gibson) - Aneurin Barnard (아뉴린 바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