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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사랑의 서사: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by reward100 2025. 3. 11.

 

Film,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편의 영화에 담아낼 수 있을까? 대니얼 콴과 대니얼 쉐이너트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통해 관객들을 눈물과 웃음, 그리고 깊은 사색으로 안내한다. 2023년 오스카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단순한 멀티버스 액션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가족 관계의 섬세한 역학을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이다.

혼돈 속에서 발견한 질서

영화는 중국계 이민자 이블린(양자경)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세탁소는 망해가고 있고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딸 조이(스테파니 수)와는 깊은 갈등 상태다. 여기에 세무조사까지 받게 된 이블린은 그야말로 인생의 최저점에 서 있다. 하지만 세무서에서 만난 '다른 우주'의 웨이먼드를 통해 그녀는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갑자기 우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심인물로 떠오른다.

이 영화의 기발함은 마치 철학자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세계를 영화적 문법으로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혼돈스러운 것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가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초현실주의적 시각 효과를 통해 전달한다. 특히 모든 것이 가능한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근본적으로 '선택'과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들, 되지 못한 자아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내가 너라면, 나는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을 거야."

비주얼의 카오스, 감정의 명료함

영화는 시각적으로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홍콩 무협영화, SF, 실존주의 드라마, 초현실주의 코미디, 가족 드라마 등 장르의 경계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마치 채널을 돌리듯 장면이 바뀌고 캐릭터의 정체성이 변화하며 시공간이 뒤틀린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각적 카오스 속에서도 영화의 감정적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우주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것은 모녀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블린의 열망이다.

특히 양자경의 연기는 경이롭다. 그녀는 쿵푸 마스터에서 피자 가게 직원, 유명 배우, 핫도그 손가락을 가진 여성 등 수십 개의 다른 버전의 이블린을 연기하면서도 각 캐릭터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관객은 이블린의 내면 여정을 명확히 따라갈 수 있는데 이는 감독과 배우의 놀라운 균형감각 덕분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충돌

영화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충돌과 세대 간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다. 이블린과 조이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모녀 갈등을 넘어 동양의 집단주의와 서양의 개인주의,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자유의 충돌을 상징한다. 특히 조이의 동성 연인을 둘러싼 갈등은 이러한 문화적 충돌을 첨예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충돌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우주를 통해 다양한 가능성과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문화와 가치관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결국 이블린이 깨닫는 것은 자신의 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허무주의의 극복과 사랑의 승리

영화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는 조이가 변신한 '조부(Jobu)'다. 그녀는 모든 것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만 그 결과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대인의 정보 과잉과 선택 피로감, 그리고 그로 인한 실존적 공허를 상징한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마비되고 무력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친절함'과 '사랑'을 제시한다. 카오스와 혼돈 속에서도 타인을 향한 작은 친절과 이해가 우주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겉보기에 단순하지만 영화의 복잡한 시각적 여정을 거친 후에는 오히려 강력한 진실로 다가온다.

"우주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나는 너와 함께하기로 선택해."

베이글과 공허: 존재의 역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베이글(공허의 상징)은 동양 철학의 '공(空)' 개념과 서양 실존주의의 '무(無)'를 동시에 상기시킨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깨달음은 절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블린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깨달음은 바로 이 역설적 진실이다.

인생의 의미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우주를 경험해본 이블린은 결국 자신의 '지금 여기'로 돌아와 불완전하지만 진실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이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도 '현재'를 선택하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멀티버스라는 SF적 상상력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결국 어머니와 딸, 부부 사이의 이해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며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사랑을 통해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세계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영화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현대인의 실존적 고민과 정체성의 혼란을 담아낸 철학적 우화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존재의 버거움'에 대한 위안이자 그 무게를 함께 나누자는 초대장이다. 혼돈 속에서도 사랑이 승리한다는 단순하지만 영원한 진리를 이토록 복잡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는 드물다.

 

 

2025년 3월 11일, 우주의 한 구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