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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예술과 우정, 삶의 순간들을 담는 여정

by reward100 2025. 5. 8.

 

Film, Faces Places, 2017

서론: 두 예술가의 유쾌한 로드 트립, 평범한 얼굴들 속에 숨겨진 이야기

프랑스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전설 아녜스 바르다 (Agnès Varda)와 젊은 거리 예술가 JR이 함께 연출하고 출연한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 Faces Places, 2017)'은 단순한 예술 프로젝트 기록을 넘어 세대를 초월한 우정과 예술을 통한 소통,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가치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보석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JR의 커다란 사진 트럭을 타고 프랑스 시골 마을들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만나는 광부, 농부, 염소 목장 주인, 공장 노동자, 부두 노동자의 아내 등 이름 없는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찍어 그들의 삶의 터전인 건물 벽이나 물탱크 등에 거대한 크기로 붙이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유쾌하고도 감동적인 여정 속에서 바르다의 지혜로운 시선과 JR의 창의적인 예술적 시도는 평범한 일상과 공간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관객에게 예술이 어떻게 삶과 연결되고 사람들을 이어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 기억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인간적인 연결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따뜻한 위로와 잔잔한 미소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다큐멘터리이다.

만남과 소통: 예술을 매개로 한 세대 간의 우정과 협업

영화의 시작은 서로 다른 세대와 예술적 배경을 가진 두 예술가,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만남 그 자체이다. 80대의 노장 감독 바르다와 30대의 젊은 사진작가 JR은 처음에는 서로의 작업 방식이나 외모(JR은 항상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으며 탐색전을 벌이지만 곧 예술에 대한 공통된 열정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그들의 협업 과정은 마치 즉흥적인 재즈 연주처럼 자유롭고 유쾌하다. JR의 사진 트럭은 즉석에서 거대한 인물 사진을 출력하여 벽에 붙일 수 있는 이동식 스튜디오이자 두 사람이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세상을 관찰하는 아지트가 된다. 바르다는 자신의 오랜 영화 경험과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JR에게 영감을 주고 JR은 젊은 세대의 감각과 기술적인 능력을 활용하여 바르다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한다.

그들의 여정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존중과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며 그들의 삶과 노동, 그리고 꿈에 귀 기울인다. 사진을 찍고 벽화를 만드는 행위는 예술가와 모델, 그리고 지역 공동체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소통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폐광촌의 마지막 남은 광부의 딸을 촬영하여 그의 옛집 벽에 붙이는 장면이나 염소 뿔을 자르지 않고 키우는 여성 농부의 자부심 넘치는 얼굴을 헛간에 새기는 장면 등은 잊혀 가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개인의 삶에 가시성과 존엄성을 부여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예술이 단순한 자기표현을 넘어 타인과의 만남과 소통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따뜻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얼굴과 장소: 평범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역사의 증언

영화의 제목 '얼굴들, 마을들(Visages Villages)'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에 주목한다. 바르다와 JR은 유명인이나 특별한 사건이 아닌 프랑스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노동자, 농부, 주부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노동의 흔적과 세월의 깊이가 새겨져 있으며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JR의 사진 트럭을 통해 거대한 크기로 확대되어 건물 벽이나 물탱크, 심지어 해변의 벙커에 붙여진 이 얼굴들은 더 이상 평범하거나 익명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장소의 역사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강력한 상징이 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삶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예를 들어, 북부 프랑스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단체 사진이 공장 벽면에 거대하게 붙여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존중받고 가시화되는 경험을 통해 자부심과 연대감을 느낀다.

이처럼 영화는 장소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생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얼굴은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속한 공동체와 역사를 반영하는 창이며 장소는 그들의 삶의 기억과 이야기가 깃든 무대이다. 바르다와 JR의 작업은 이러한 얼굴과 장소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재해석하고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 가는 사람들의 존재를 기록하고 기념하는 행위이다. 그들의 카메라는 마치 고고학자의 손길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 묻혀 있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현재의 시간 속에 새롭게 되살려낸다. 이는 예술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를 잇고 개인의 기억을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이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예술의 영원성이라는 환상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다루며 예술의 영원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르다는 자신의 노화와 시력 저하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지나간 시간과 사라져가는 기억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함께 작업했던 동료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를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상실감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JR이 만든 거대한 벽화들 역시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해변 벙커에 붙여진 바르다의 친구 기 부르댕(Guy Bourdin)의 사진은 하룻밤 사이에 밀물에 휩쓸려 사라지고 다른 벽화들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바람에 의해 훼손될 운명이다. 이는 예술 작품 역시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순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존재의 유한성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예술이 비록 물리적으로는 사라질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낸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벽화가 사라진 후에도 그 작품을 함께 만들고 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 순간의 즐거움과 의미가 남아있을 것이다. 바르다와 JR의 여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그들이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그리고 함께 경험한 순간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기록되고 공유됨으로써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이는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물질적인 영속성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신적인 울림과 인간적인 연결에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예술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이자 동시에 덧없는 순간들을 포착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증거인 것이다.

두 예술가의 시선: 유머와 지혜,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아녜스 바르다와 JR이라는 두 예술가의 독특한 개성과 그들 사이의 따뜻한 케미스트리이다. 바르다는 누벨바그의 거장다운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술적 감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유머 감각,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잃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평범한 것들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해내는 지혜를 보여준다. JR은 젊은 세대의 예술가답게 대담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바르다의 경험과 지혜를 존중하며 그녀와 진심으로 교감한다. 그들의 나이 차이와 서로 다른 배경은 오히려 서로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사진 트럭을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모습, 서로 농담을 주고받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미소 짓게 만든다. 그들의 여정은 단순한 예술 프로젝트를 넘어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즐거움을 나누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바르다가 자신의 눈 건강 문제나 죽음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노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처럼 영화는 두 예술가의 인간적인 매력과 그들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론: 삶이라는 예술, 예술이라는 삶, 그 아름다운 동행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예술과 삶, 기억과 시간, 그리고 인간적인 연결의 소중함에 대한 따뜻하고도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아름다운 다큐멘터리이다. 아녜스 바르다와 JR이라는 두 매력적인 예술가의 유쾌하고도 감동적인 여정은 관객에게 잔잔한 미소와 함께 깊은 울림을 선사하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평범한 얼굴들과 장소들 속에 숨겨진 특별한 이야기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이 영화는 예술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사람들을 연결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한 벽화들은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그 벽화들이 만들어낸 만남과 소통의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삶 자체가 한 편의 아름다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예술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음을 따뜻하게 증명하는 우리 시대의 사랑스러운 영화적 여정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