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2018)
감독: 브라이언 싱어 (Bryan Singer), 덱스터 플레처 (Dexter Fletcher)
주연: 라미 말렉 (Rami Malek), 루시 보인턴 (Lucy Boynton), 귈림 리 (Gwilym Lee), 벤 하디 (Ben Hardy), 조 마젤로 (Joe Mazzello)
기억의 박물관에서 울려 퍼지는 에코
시간은 박물관의 미로와 같다. 우리는 그 속을 걸으며 과거의 유물들을 감상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살아 숨쉬던 순간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 시간의 박물관에 갇힌 퀸(Queen)이라는 전설적 밴드의 유물들을 단순히 전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유리 케이스를 깨고 박제된 시간에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을 부린다.
브라이언 싱어와 덱스터 플레처의 연출은 하나의 기억 장치로 작동한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퀸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느껴본 적 없는' 퀸을 경험하게 한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로 분한 라미 말렉(Rami Malek)이 무대에 서는 순간 그는 단순한 모방이나 재현을 넘어선다. 말렉은 프레디의 영혼을 빌려 입은 듯 관객들이 프레디를 처음 만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시간의 압축과 확장의 미학
이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가장 큰 미학적 성취를 이룬다. 퀸의 15년 여정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감독들은 역설적으로 시간을 확장한다. 영화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그 안의 순간들은 무한히 확장되어 관객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처럼 영화는 시간을 빨아들이는 동시에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한다.
특히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 장면은 시간의 압축과 확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다. 실제 20분 공연을 영화는 10여분으로 압축하지만 그 강렬한 에너지는 영화관을 넘어 관객의 일상까지 확장된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나 재현이 아닌 시간을 초월한 예술적 해석이다.
음악: 시간의 지층을 관통하는 소리
영화는 퀸의 음악을 단순한 사운드트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음악은 시간의 지층을 관통하는 지질학적 현상으로 그려진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곡이 탄생하는 과정은 마치 지구의 지각이 움직이며 새로운 대륙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장엄함을 품고 있다.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귈림 리 분)의 기타 리프,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벤 하디 분)의 드럼, 존 디콘(John Deacon, 조 마젤로 분)의 베이스, 그리고 프레디의 목소리는 각기 다른 시대의 지층처럼 쌓이며 하나의 거대한 음악적 지형을 만들어낸다.
음악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영화의 백미다. 아티스트의 창작 과정이라는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마치 인간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를 색과 형태로 그려내는 것과 같은 도전이었으며 영화는 이를 음악이라는 시간예술과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의 완벽한 융합을 통해 해결한다.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 오디세우스
프레디 머큐리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록스타가 아닌 정체성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현대판 오디세우스로 그려진다. 인도 파시족 출신의 영국인, 이교도 이름을 버리고 선택한 새 이름, 그의 복합적 성정체성, 그리고 무대 위와 아래의 극명한 대비는 모두 경계에 선 인간의 고독과 발견을 상징한다. 라미 말렉은 프레디의 이러한 다층적 정체성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모방이 아닌 해석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프레디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둘러싼 내적 갈등을 겪는 장면들은 한 개인의 사적 고뇌를 넘어 사회적 편견과 자기 발견 사이의 보편적 인간 드라마로 확장된다. 메리 오스틴(Mary Austin, 루시 보인턴 분)과의 관계는 사랑의 형태가 변할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서사다.
신화의 재구성: 영웅의 여정과 귀환
보헤미안 랩소디는 표면적으로는 음악 전기영화지만 그 심층에는 고전적 영웅 서사의 현대적 변주가 자리하고 있다. 프레디의 여정은 조셉 캠벨이 말한 '영웅의 여정'의 구조를 따른다. 평범한 세계를 떠나(가족과의 결별), 시험을 거치고(음악 산업과의 투쟁), 조력자를 만나며(밴드 멤버들), 궁극의 시련(에이즈 진단)을 통과한 뒤, 변화된 모습으로 귀환(라이브 에이드)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웅은 완벽하지 않다. 실수하고, 상처받고, 때로는 오만해지며, 그럼에도 결국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인간적인 영웅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신화의 재구성이며 불완전함 속에서 완전함을 찾는 역설적 여정이다.
시각적 언어: 프레임 속의 음악
뉴턴 토머스 시걸(Newton Thomas Sigel)의 촬영은 음악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놀라운 작업이다. 카메라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마치 밴드의 다섯 번째 멤버처럼 음악의 리듬과 함께 움직인다. 특히 공연 장면에서 카메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퀸과 함께 호흡하게 만든다.
색채의 사용 또한 프레디의 내면 여정을 시각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반의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은 점차 화려하고 강렬한 무대 조명의 색채로 대체되며 말년의 고독과 성찰의 시간은 다시 차분한 색조로 표현된다. 이러한 색채의 변주는 음악의 화음처럼 영화의 정서적 층위를 풍부하게 한다.
진실과 허구 사이: 영화적 리얼리티의 경계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했듯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몇 가지 창작적 자유를 취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거짓'이라기보다 '시적 진실'의 추구로 바라보고자 한다. 영화는 문자 그대로의 기록물이 아니라 시간의 압축과 확장을 통해 더 큰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 작품이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 전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는 설정, 밴드의 해체와 재결합의 시기적 조정 등은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변형은 드라마적 효과를 통해 프레디와 퀸이 우리 문화사에 미친 영향의 본질을 더 강렬하게 전달한다. 진정한 전기영화의 가치는 연대기적 정확성보다 그 인물의 정신과 유산을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하는가에 있다.
침묵의 미학: 소리 없는 순간들의 힘
음악영화의 역설 중 하나는 때로 가장 강력한 순간이 음악이 멈춘 침묵 속에서 찾아온다는 것이다. 영화 속 프레디가 에이즈 진단을 받은 후 홀로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을 거닐며 고독을 느끼는 장면은 어떤 화려한 공연장면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감정과 사색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
존 오트만(John Ottman)의 편집은 이러한 소리와 침묵의 리듬을 음악적 감각으로 다룬다. 빠르게 진행되는 몽타주와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의 교차는 마치 음악의 빠른 구간과 느린 구간의 대비처럼 영화에 역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한다. 특히 프레디의 내면적 상태와 외부적 사건을 교차 편집하는 방식은 영화의 정서적 깊이를 더한다.
시대의 초상: 70-80년대라는 캔버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밴드의 이야기를 넘어 1970-80년대라는 시대의 초상화를 그린다. 아론 헤밍웨이(Aaron Hemmingway)의 프로덕션 디자인과 줄리언 데이(Julian Day)의 의상 디자인은 당시의 시각적 미학을 완벽하게 재현하면서도 단순한 노스탤지어를 넘어선다. 그들은 시대적 디테일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암시하며 이를 통해 퀸의 음악이 왜 그토록 혁명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영화는 에이즈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의 공포와 불확실성,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직면했던 사회적 편견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프레디의 개인적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개인사의 교차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유산과 기억: 음악의 영원성
영화의 마지막은 단순한 엔딩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종결이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재현한 마지막 시퀀스는 프레디와 퀸의 물리적 존재는 유한할지 모르나 그들의 음악적 유산은 영원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는 죽음을 넘어선 예술의 불멸성에 대한 찬가이며 프레디 머큐리라는 인물이 육체적 소멸을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가 프레디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그의 삶과 창조적 순간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이는 '부재'보다 '존재'에, '상실'보다 '창조'에 방점을 찍는 영화적 선택이며 관객들이 프레디를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결론: 시간의 바다를 항해하는 음악
보헤미안 랩소디는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정체성과 창조성,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적 명상이다. 라미 말렉의 변신을 통해 프레디 머큐리는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선다. 그러나 이제 그 무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집단적 기억과 문화적 유산이라는 추상적 공간이다.
영화가 끝나도 음악은 계속된다. 마치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곡이 전통적인 노래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듯이 이 영화는 전기영화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로서의 음악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퀸의 음악이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듯이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와 음악, 기록과 창작,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그리고 그 흐릿한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보다 선명한 진실을 발견한다. 영화의 진정한 성취는 프레디 머큐리와 퀸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현재 시제로 '경험'하게 했다는 데 있다.
- 2025년 4월 12일 시간의 복도를 걷는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