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익숙한 세계의 이방인, 그 매혹적이고 위험한 관찰
조나단 글레이저 (Jonathan Glazer) 감독의 '언더 더 스킨 (Under the Skin, 2013)'은 SF 스릴러의 외피를 가졌지만 그 어떤 장르적 관습에도 쉽게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독창적이고도 불가사의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의 음울하고 황량한 풍경 속을 배회하며 남성들을 유혹하는 정체불명의 여성(스칼렛 요한슨, Scarlett Johansson 분)의 시점을 따라간다. 그녀는 인간의 외피(skin)를 뒤집어쓴 외계 존재이며 유혹에 넘어온 남성들을 미지의 검은 액체 속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내용물'을 채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영화는 이 외계 존재의 비인간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여기는 인간 사회의 모습, 인간의 육체성, 감정,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을 극도로 낯설고 기이하게 재조명한다. 대사는 극도로 절제되고 서사적 설명은 최소화된 채,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미카 레비(Mica Levi)의 불안하고 불협화음적인 음악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며 관객에게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언더 더 스킨'은 단순한 외계인 침공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Other)의 시선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그 취약성을 탐구하는 깊고도 시적인 영상 철학이다.
외계인의 시선: 인간 사회에 대한 냉담한 관찰과 소외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인 외계 존재의 시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녀의 눈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거리 풍경, 쇼핑몰, 클럽 등 인간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관찰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사람들의 대화는 의미 없는 소음처럼 들리고 그들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고 기이하게 보인다. 그녀는 인간의 외모를 모방하고 유혹적인 행동을 학습하지만 그것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위장술일 뿐 진정한 공감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인간 사회의 모습을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규범, 관계 맺는 방식, 감정 표현 등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특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레이저 감독은 실제 스코틀랜드 거리에서 몰래카메라 기법을 활용하여 일반인들의 반응을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한다. 스칼렛 요한슨이 운전하는 밴에 아무것도 모른 채 올라타는 남성들의 모습은 다큐멘터리적인 사실감을 부여하며 동시에 외계 존재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우리는 그녀의 정체를 알기에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지하지만 화면 속 남성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관객에게 윤리적인 불편함과 함께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포획될 수 있는 나약한 생명체일 뿐이다.
검은 액체와 붉은 내부: 육체성의 해체와 본질에 대한 질문
주인공 외계 존재에게 유혹되어 따라온 남성들이 맞이하는 운명은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구현된다. 그들은 옷을 벗고 검은 액체로 가득 찬 미지의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액체 속에서 부유하며 점차 피부(skin)가 벗겨지고 내부의 붉은 내용물만 남은 채 소멸한다. 이 검은 공간은 외계 존재의 함정이자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인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의식과 감정인가? 검은 액체는 인간의 외피, 즉 사회적 정체성이나 겉모습을 무력화시키고 그 본질적인 내용물만을 추출해내는 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개별성과 고유성은 사라지고 단지 에너지원이나 재료로 환원되는 듯한 섬뜩함을 안겨준다.
이러한 육체성의 해체는 주인공 외계 존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되는 계기와도 연결된다. 그녀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이 느끼는 감각이나 욕망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성관계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여전히 비인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 육체와 정신, 외면과 내면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며 인간적인 경험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형태를 넘어선 복합적인 무엇임을 암시한다.
공감의 씨앗: 타자에 대한 연민과 정체성의 균열
냉담하게 임무를 수행하던 주인공 외계 존재에게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은 신경섬유종증으로 인해 얼굴이 심하게 변형된 한 남자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그녀는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유혹하지만 그의 순수함과 외로움,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차마 그를 검은 액체 속으로 보내지 못하고 풀어준다. 이 사건은 그녀의 내면에 처음으로 '공감' 혹은 '연민'과 유사한 감정이 싹트는 순간이며 그녀의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처럼 냉담하게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신의 역할을 벗어던진다.
이후 그녀는 인간 사회 속으로 숨어들어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가려 시도한다. 낯선 남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간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그녀가 경험하는 인간적인 감정들 – 두려움, 호기심, 연민, 외로움 – 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외형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공유하고 상처받으며 변화하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비극적 결말: 껍데기와 본질, 그리고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
인간 사회에 적응하려던 그녀의 시도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숲 속에서 만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려던 순간 그녀의 인간 외피가 벗겨지면서 검은색의 비인간적인 본모습이 드러난다. 공포에 질린 남자는 그녀에게 불을 지르고 그녀는 고통 속에서 불타 사라진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는다. 그녀의 죽음은 인간 사회가 타자(이질성)를 얼마나 폭력적으로 배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인간적인 감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약해지고 파멸에 이른 외계 존재의 비극일 수도 있다. 혹은 그녀가 입고 있던 인간의 '껍데기(skin)'가 결국 그녀의 진정한 본질을 담아낼 수 없었음을 그리고 그 불일치가 결국 파국을 초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외계 존재의 정체나 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는 왜 지구에 왔는가? 그녀가 채취한 인간의 내용물은 어디에 사용되는가? 그녀의 동족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의도적으로 미해결 상태로 남겨진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기원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녀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가이다. 그녀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맞이하며 인간과 비인간, 이해와 오해, 공감과 폭력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결론: 피부 아래 숨겨진 인간성에 대한 감각적 탐험
'언더 더 스킨'은 관습적인 서사와 설명을 거부하고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분위기를 통해 관객의 감각과 직관에 직접 호소하는 영화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외계 존재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낯설고 근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인간성의 조건들 – 육체성, 감정, 공감 능력, 사회성 – 에 대해 새롭고도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 없는 연기와 미카 레비의 불길한 음악,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풍경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독특한 미학적 경험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속에 남아 존재와 인식에 대한 깊은 잔상을 남긴다. '언더 더 스킨'은 단순한 SF 스릴러를 넘어 피부 아래 숨겨진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그 취약성을 탐구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적 시도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