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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강, 기억의 조각, 삶의 마지막 시어(詩語): '영원과 하루'

by reward100 2025. 5. 3.

 

Film, Eternity and a Day, 1998

서론: 죽음을 앞둔 시인의 마지막 하루, 시간과 기억 속으로의 여행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테오 앙겔로풀로스 (Theo Angelopoulos) 감독의 '영원과 하루 (Eternity and a Day / Mia aioniotita kai mia mera, 1998)'는 삶의 마지막을 앞둔 한 노시인의 하루를 통해 시간, 기억, 언어, 역사,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고도 시적인 언어로 탐구하는 명상적인 걸작이다. 그리스의 저명한 시인 알렉산더 (브루노 간츠, Bruno Ganz 분)는 심각한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병원 입원을 하루 남겨둔 채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는 우연히 만난 어린 알바니아 난민 소년 (아킬레스 스케비스, Achileas Skevis 분)과 동행하며 테살로니키의 안개 낀 풍경 속을 거닐고 그 과정에서 젊은 시절 사랑했던 아내 안나 (이자벨 르노, Isabelle Renauld 분)와의 행복했던 기억, 19세기 그리스 민족 시인 솔로모스의 미완성 시에 대한 탐구, 그리고 현재의 황량한 현실이 교차하는 시간 여행을 경험한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특유의 롱테이크와 유려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상징적인 미장센을 통해 현실과 기억,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을 시인의 내면 풍경과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의 여정으로 초대한다.

알렉산더의 하루: 삶의 경계에서 되돌아보는 시간의 의미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에게 주어진 '하루'는 단순한 24시간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응축되고 재구성되는 상징적인 시간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경계를 앞두고 그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젊은 시절 아내 안나와 함께 보냈던 해변에서의 행복한 순간들, 딸과의 대화, 친구들과의 교류 등 과거의 파편들은 현재의 황량한 풍경과 중첩되며 그의 내면을 채운다. 앙겔로풀로스는 플래시백과 같은 인위적인 장치 대신 유려한 카메라 이동과 미장센의 변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예를 들어, 현재의 알렉산더가 창밖을 바라보면 창밖 풍경은 과거 아내와 함께 춤을 추던 해변으로 변해 있고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장면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러한 연출은 시간이란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의식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경험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지나온 시간들의 의미를 되새기려 한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시(詩)와 언어가 과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었는지 회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놓쳐버린 순간들을 아쉬워한다. 그의 마지막 하루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가치 – 사랑, 소통, 순간의 아름다움 – 를 뒤늦게 깨닫고 그것을 붙잡으려는 애틋한 여정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역설은 관객에게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알바니아 소년: 현재의 타자, 미래의 희망, 그리고 언어의 경계

알렉산더의 마지막 하루에 예기치 않게 동행하게 된 알바니아 난민 소년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불법 이민, 인신매매, 폭력)을 상기시키는 존재이자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알렉산더는 소년을 돕기 위해 국경 너머 알바니아까지 함께 가기로 결심하고 이 여정은 그의 개인적인 시간 여행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 맺기, 그리고 역사와 사회 현실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소년과의 만남은 알렉산더가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침잠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현재의 고통받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연대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특히 알렉산더와 소년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완벽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만 몸짓, 눈빛, 그리고 알렉산더가 가르쳐주는 그리스어 단어들을 통해 조금씩 교감해 나간다. 이는 언어가 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때로는 장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알렉산더는 평생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감정(사랑, 후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소년에게 '이방인(Xenos)', '고독(Koritsani)', '밤(Argathini)'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가르쳐주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함께 배워나간다. 이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그리고 진정한 소통은 언어를 넘어선 교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솔로모스의 시: 언어의 탐구, 민족의 역사, 그리고 미완의 삶

알렉산더는 평생 동안 19세기 그리스 민족 시인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Dionysios Solomos)의 미완성 시 '자유로운 포위된 사람들(The Free Besieged)'을 완성하는 데 몰두해왔다. 솔로모스는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투르크 군대에 포위된 메시olonghi 사람들의 저항을 시로 쓰려 했지만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아 그리스어에 서툴렀기에 단어를 사 모으는 방식으로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더는 솔로모스처럼 '단어를 사서' 시를 완성하려 하지만 결국 언어만으로는 삶의 복합적인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솔로모스의 미완성 시는 알렉산더 자신의 미완의 삶, 즉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놓쳐버린 후회를 상징한다.

영화 속에서 알렉산더는 솔로모스의 환영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 장면은 알렉산더가 자신의 예술적 탐구와 삶을 되돌아보는 내면적 성찰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솔로모스에게 "단어들이 침묵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솔로모스는 "침묵 속에서 들어야 한다"고 답한다. 이는 언어 너머의 진실, 즉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솔로모스의 시가 그리스 민족의 역사적 고통과 저항 정신을 담고 있듯이 알렉산더의 여정 역시 현재 그리스(혹은 유럽 전체)가 겪고 있는 난민 문제, 국경 문제 등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연결된다. 개인의 삶과 기억은 민족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예술은 이러한 집단적 경험을 성찰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적인 영상 언어: 롱테이크, 안개, 그리고 경계의 미학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는 특유의 시적인 영상 언어로 유명하다. '영원과 하루' 역시 그의 미학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카메라는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과 분위기,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담담하게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특히 롱테이크 기법은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카메라는 컷 없이 오랫동안 인물들을 따라가거나 풍경을 비추면서 관객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고 그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롱테이크는 또한 과거와 현재, 현실과 기억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유려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안개와 비, 바다의 이미지는 현실과 기억, 삶과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안개는 시야를 가리고 모든 것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며 마치 알렉산더의 불확실한 기억과 다가오는 죽음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바다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시간의 강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근원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국경의 이미지 역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지리적인 경계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들을 상징한다. 앙겔로풀로스는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과 철학적 사유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깊은 시각적, 정서적 울림을 선사한다.

결론: 영원 같은 하루,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명상

'영원과 하루'는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마지막 하루를 통해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깊고 아름다운 영화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시간과 기억, 언어와 역사, 개인과 공동체,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들을 시적인 영상 언어와 철학적인 성찰로 엮어내며 관객에게 단순한 감동을 넘어선 깊은 사유의 경험을 제공한다. 알렉산더의 여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강을 따라 흘러가며 기억의 조각들을 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고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놓쳐버린 순간들을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타인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 작은 연대의 몸짓, 그리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소중한 순간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삶을 지속할 이유와 용기를 준다. 알렉산더가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묻는 "내일은 얼마나 갈까?"라는 질문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 속에 영원이 담길 수 있음을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는 의미를 찾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깊고도 여운이 남는 시어(詩語)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