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텅 빈 길 위의 외침: 소통의 파열음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2017년 작은 미주리 주 외곽, 잊힌 도로 위의 세 개의 낡은 광고판에서 시작한다. 그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 역시 인간 관계의 기묘한 역학, 폭력과 유머의 불편한 동거, 그리고 도덕적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딸 안젤라의 끔찍한 죽음 이후 일곱 달, 아무런 진척 없는 수사에 분노한 밀드레드 헤이즈(Frances McDormand)는 이 빌보드에 지역 경찰 서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도발적인 메시지를 내건다.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고?", "어째서입니까, 윌러비 서장?") 이 행위는 단순한 항의나 정의 구현의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꽉 막힌 슬픔과 분노가 터져 나온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그녀만의 거칠고 날 선 필사적인 방식이다. 마치 곪아 터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처럼 그녀의 언어는 정제되지 않았고 때로는 주변을 오염시킨다. 고요하고 폐쇄적인 마을 에빙(Ebbing)은 이 세 개의 광고판으로 인해 순식간에 균열하고 들끓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파열음을 통해 상실의 고통이 어떻게 개인을 고립시키고 또 어떻게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타인과의 연결(혹은 충돌)을 갈망하게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밀드레드의 빌보드는 침묵하는 세상에 던지는 돌멩이이자 그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해받지 못한 슬픔: 밀드레드와 윌러비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 밀드레드는 분노로 갑옷을 두른 어머니다. 그녀의 분노는 딸을 잃은 슬픔에서 비롯되었기에 정당성을 갖지만 그 표현 방식은 종종 선을 넘고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다. 아들 로비(Lucas Hedges)에게조차 냉담하고 공격적이며 자신을 동정하거나 도우려는 이들(치과 의사나 신부 등)에게 가차 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녀의 언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이자 세상을 향한 무기이며 타인의 공감을 거부하는 동시에 갈망하는 모순적인 외침이다.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사치 또는 위선으로 여기는 듯하며 오직 분노를 동력 삼아 정의인지 복수인지 모를 길을 향해 나아간다. 그녀의 단단함은 때로 위태로워 보이며 그 이면의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언뜻 비칠 때 관객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의 분노가 직접적으로 향하는 대상인 윌러비 서장(Woody Harrelson)은 전형적인 무능하거나 부패한 경찰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마을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가족을 사랑하며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는 온화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이다. 하지만 그 역시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사건과 자신에게 닥친 병마(췌장암) 앞에서 인간적인 무력감을 느낀다. 밀드레드와 윌러비의 관계는 이 영화가 섬세하게 포착하는 '서툰 공감'과 '어긋난 소통'의 한 예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대립하지만 조사실에서의 짧은 대화나 윌러비의 갑작스러운 피 토함 같은 순간들을 통해 서로의 고통과 인간적인 면모를 어렴풋이 감지하기도 한다. 특히 윌러비가 밀드레드에게 남긴 편지는 죽음을 앞둔 자의 담담한 성찰이자 자신을 공격했던 그녀에게 건네는 이해와 위로의 복잡한 제스처다. 그는 명확한 해답이나 해결책 대신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좋은 순간'을 찾으려는 의지와 타인을 향한 '생각'(thought)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깊은 여운과 함께 아이러니한 연결의 가능성을 남긴다.
증오에서 공감으로?: 딕슨의 불안한 변모
샘 록웰(Sam Rockwell)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탁월하게 연기한 제이슨 딕슨 경관은 이 영화의 가장 문제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엄마(마마 딕슨)에게 의존하며 사는 인종차별적(흑인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암시)이고 폭력적이며(광고업자 레드를 창밖으로 던지는 등)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구제 불능'처럼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밀드레드의 광고판을 자신과 윌러비 서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격렬하고 유치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권위를 모독했다고 생각해 그녀와 그녀 주변인들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그의 증오와 분노는 명확한 대상이나 논리 없이 표류하며 사회의 구조적 편견과 개인의 깊은 열등감, 미성숙함이 결합된 위험한 형태를 띤다. 그는 에빙이라는 작은 마을이 가진 병폐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윌러비 서장의 사려 깊은 편지와 그의 예상치 못한 죽음,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끔찍한 대가(해고 및 전신 화상)를 치르면서 딕슨은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한다. 윌러비는 편지에서 딕슨 안의 잠재된 선한 가능성을 믿는다며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Anger begets greater anger.)"는 핵심적인 충고와 함께 형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이나 증오가 아닌 '생각'이며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병상에서 우연히 엿들은 대화를 통해 안젤라 사건의 잠재적 용의자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 딕슨은 비록 무모하고 폭력적인 방식일지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하려는 듯한 행동에 나선다. 하지만 그의 변화는 결코 완전한 '개과천선'이나 '영웅적 각성'으로 미화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충동적이고 그의 동기는 순수한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윌러비 서장에 대한 부채감, 혹은 여전히 방향을 찾지 못한 분노와 복수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 말미, 밀드레드와 딕슨이 잠재적 용의자를 찾아 함께 길을 떠나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서로의 행동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며 목적지에 도착해서 무엇을 할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이것은 구원이나 화해가 아닌 또 다른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한 두 상처 입은 영혼의 위태로운 동행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서툰 연대는 깨끗하거나 아름답지 않고 그들의 공감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완성이다. 이것이 맥도나 감독이 보여주는 현실적인 인간 변화의 모습일 것이다.
주변의 시선, 깨어진 공동체
<쓰리 빌보드>는 밀드레드, 윌러비, 딕슨이라는 세 중심인물 외에도 에빙이라는 작은 마을 공동체의 다양한 얼굴들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밀드레드의 도발적인 광고에 분노하며 그녀를 비난하고 위협하는 익명의 주민들, 그녀에게 어색하지만 진심 어린 동정심을 보이며 데이트를 신청하는 제임스(Peter Dinklage),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밀드레드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폭력적인 전남편 찰리(John Hawkes)와 그의 철없는 어린 여자친구 페넬로페(Samara Weaving), 광고판 설치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딕슨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는 순진한 광고업자 레드 웰비(Caleb Landry Jones), 그리고 윌러비 사후 부임하여 원칙적이지만 다소 냉담하게 사건을 대하는 새로운 경찰서장 애버크롬비(Clarke Peters) 등. 이들은 각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사건에 연루되고 반응하며 작은 마을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과 동시에 작동하는 잔인한 폭력성, 뿌리 깊은 편견과 위선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들의 존재는 밀드레드의 투쟁이 단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침묵하고 방관하거나 혹은 동조하는 공동체 전체를 향한 외침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어떻게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개인들을 더욱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발휘되는 사소하지만 인간적인 연민(레드 웰비가 밀드레드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는 장면 등)이나 도움의 손길을 언뜻 비추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공감과 연대는 대부분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이며 견고한 편견과 무관심의 벽 앞에서 근본적인 이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에빙은 서로의 속사정을 너무 잘 알지만 역설적으로 서로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거나 외면하는 현대 사회의 냉정한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해답 없는 질문, 서툰 연대의 가능성
마틴 맥도나 감독은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어떤 명쾌한 해답이나 도덕적 교훈, 혹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안젤라를 죽인 진짜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인물들의 변화와 구원 역시 불완전하고 모호하게 심지어는 위태롭게 그려진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빌보드를 태운 방화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고 끝내 해소되지 않으며 딕슨의 성장은 여전히 미완성이며 그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자 미덕은 바로 이러한 모호함과 불확실성, 그리고 불편함에 있다. 삶은 종종 해결되지 않고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으며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고 정의는 쉽게 구현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맥도나 특유의 블랙 유머는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잠시 환기시킬 뿐 본질적인 고통을 희석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한 절망이나 냉소주의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가가려 시도하고 연결되기를 갈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방식이 서툴고, 때로는 공격적이며, 종종 실패하고 오해를 낳을지라도 말이다. 밀드레드와 딕슨의 마지막 여정은 그 자체로 '서툰 연대'의 가장 극적인 예시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용서하거나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의심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의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어쩌면 '정의' 혹은 '복수'에 대한 비슷한 갈망 속에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함께 길을 나선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할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무언가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서툴지만 분명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쓰리 빌보드>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분노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가? 진정한 정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혹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들에 섣불리 답하는 대신 상처 입고 결함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질문들과 처절하게 씨름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독한 복잡성과 불완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아주 가끔 발견되는 이해와 연민, 그리고 희미한 희망의 빛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이 <쓰리 빌보드>가 단순한 복수극이나 사회 고발 드라마를 넘어 깊은 인간 탐구로서 오래도록 기억될 이유다.
주요 등장인물 및 배우
- 밀드레드 헤이즈 (Mildred Hayes) - Frances McDormand (프랜시스 맥도먼드)
- 빌 윌러비 서장 (Sheriff Bill Willoughby) - Woody Harrelson (우디 해럴슨)
- 제이슨 딕슨 경관 (Officer Jason Dixon) - Sam Rockwell (샘 록웰)
- 로비 헤이즈 (Robbie Hayes) - Lucas Hedges (루카스 헤지스)
- 제임스 (James) - Peter Dinklage (피터 딘클리지)
- 찰리 헤이즈 (Charlie Hayes) - John Hawkes (존 호크스)
- 앤 윌러비 (Anne Willoughby) - Abbie Cornish (애비 코니시)
- 레드 웰비 (Red Welby) - Caleb Landry Jones (케일럽 랜드리 존스)
- 애버크롬비 서장 (Chief Abercrombie) - Clarke Peters (클라크 피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