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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땅, 꺼지지 않는 불씨: "하얼빈"의 내적 풍경화

by reward100 2025. 4. 16.

 

Film, Harbin, Korean movie, 2024

1. 기념비 너머의 풍경: <하얼빈>의 질문

2024년 12월 24일, 시대의 부름처럼 <하얼빈>은 마침내 관객 앞에 섰다. 우민호 감독(Woo Min-ho)은 300억 원이라는 육중한 예산과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무게감을 짊어지고, 익숙한 영웅 서사의 안온함을 거부한다. 영화는 하얼빈의 얼어붙은 대지를 단순한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시대의 빙하기와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기념비 속 위인이 아니라 혹한 속에서 자신의 길을 피로 새겨나가는 한 인간, 안중근(현빈, Hyun Bin)의 흔들리는 뒷모습이다.

<하얼빈>은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신화의 제단에서 끌어내려 우리와 같은 지평에 세운다. 역사적 사실의 연대기적 나열 대신 영화는 그 사건들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와 선택의 순간들을 파고든다. 왜 그는 그 길을 가야만 했는가? 무엇이 그를 흔들고 또 무엇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는가? 영화는 쉬운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의 형태로 관객의 마음에 스며든다.

2. 균열과 고독: 영웅이라는 신기루

현빈이 연기하는 안중근은 우리가 박제된 이미지로 소비해 온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만국공법을 따른 결정 하나가 동지들의 몰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돌아오는 아이러니를 감당해야 한다. 모리 다쓰오(박훈, Park Hoon)라는 살아있는 죄책감은 그의 여정을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영화 초반, 그의 나지막한 독백은 영웅의 확신이 아닌 인간적 번민의 깊이를 드러낸다.

“길을 잃었습니다.”

이 짧은 고백은 <하얼빈>이 탐구하는 인간 안중근의 핵심이다. 그는 대의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던지고 그 무게에 짓눌린다. 우덕순(박정민, Park Jung-min), 김상현(조우진, Cho Woo-jin), 공부인(전여빈, Jeon Yeo-been), 그리고 묵묵히 지원하는 최재형(유재명, Yoo Jae-myung)과의 관계 역시 단순한 동지애로 포장되지 않는다. 믿음과 의심, 연대와 균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혁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린 개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 영화는 영웅을 찬양하는 대신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고독과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3. 시리도록 푸른 절망, 그 속의 온기: 공간과 시선

홍경표 (Hong Kyung-pyo)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하얼빈의 혹한을 스크린 위에 시각적 언어로 번역한다. 영하 40도의 추위, 끝없이 펼쳐진 설원,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시대의 절망과 인물들의 황량한 내면을 투영하는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시리도록 푸른 톤의 영상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잔혹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대의 공기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절망적인 풍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온기를 길어 올린다. 얼어붙은 강 위를 위태롭게 걷는 안중근의 모습은 고립된 개인의 투쟁인 동시에 차가운 현실에 맞서 나아가는 인간 의지의 상징이다.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모여드는 과정, 서로에게 건네는 짧지만 깊은 눈빛,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다독이는 작은 몸짓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피어나는 작지만 끈질긴 불씨와 같다. 미장센은 절망의 깊이와 희망의 가능성을 동시에 시각화하며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4. 침묵과 외침 사이: 역사를 관통하는 목소리

<하얼빈>은 대사뿐 아니라 침묵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거사를 앞둔 긴장감 속에서 오가는 무언의 눈빛, 동지의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그 후의 먹먹한 침묵은 때로는 어떤 웅변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 시대를 관통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적장 이토 히로부미(リリー・フランキー, Lily Franky)의 냉소적인 분석은 오히려 저항의 끈질김을 반증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한 나라지만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고뇌와 좌절을 딛고 선 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로 승화된다.

“어둠은 짙어 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다. 길을 잃었던 자가 마침내 찾아낸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이 되려는 결단이다. 영화는 이 목소리를 통해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관객을 연결하며 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연대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5. 현재진행형의 역사: <하얼빈>의 독창성

<하얼빈>의 진정한 미덕은 역사를 박제된 과거로 전시하는 대신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하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완성된 영웅'보다는 '만들어져 가는 인간'에 주목한다. 안중근의 죄책감과 회의는 영웅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욱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로 만든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성의 본질임을 영화는 역설한다.

또한, 영화는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는다. 대신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독립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그 길 위에서 각자가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과 관계의 역학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함께'라는 가치에서 찾으려 한다.

6. 결론: 시대를 밝히는 인간이라는 불씨

<하얼빈>은 차갑고 무거운 영화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 뜨거운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얼어붙은 땅 위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의지,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향하는 연대의 온기, 그리고 길을 잃었기에 더욱 치열하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했던 한 인간의 불꽃이다. 현빈의 안중근은 더 이상 위인전 속 영웅이 아닌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장엄한 역사적 서사시인 동시에 한 인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 드라마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하얼빈>은 쉽게 답을 주지 않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에 오래도록 타오르는 질문이라는 불씨를 남긴다. 그리고 그 불씨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