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가운데, 우리 모두의 벌새」
어느 날 문득,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정말 나만의 것이었을까? 영화 《벌새》는 1990년대 중반 서울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소녀 ‘은희’가 세상과 부딪히며 성장하는 순간들을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감독 김보라는 소녀가 겪는 미묘한 감정의 결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우리가 미처 짚어보지 못했던 ‘보편적인 외로움과 사랑의 욕구’를 되짚어준다. 문득 날아오르려는 벌새처럼 작은 날갯짓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이 소녀의 모습은, 1994년이라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우리의 옛 모습이기도 하다.
1. 줄거리: 작은 세계를 향한 작은 날갯짓
은희(박지후 분)는 중학생이다. 사소한 오해와 갈등 속에서 매일 어딘가 부유하는 기분으로 지낸다. 가족들은 각자 살아가기 바쁘고, 학교에서도 크고 작은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지만, 정작 은희는 그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친구들과의 관계 역시 미묘하다. 절친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등을 돌리기도 하고, 첫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에게서 실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은희 앞에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가 나타난다. 영지는 은희에게 “너는 네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을 전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다. 따뜻한 시선, 조용한 위로가 스며들면서, 은희의 일상은 조금씩 빛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무심하게 흘러가고, 결국 1994년을 상징하는 비극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지며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잔잔했던 호수 위에 커다란 돌이 던져진 듯, 그 충격의 파동이 은희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 그날 이후, 소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2. 시대적 배경: 1994년, 혼란과 변화의 해
영화는 1994년 서울의 골목과 아파트 단지, 학원가 풍경을 사실감 있게 재현한다. 당시 번화가에는 삐삐와 오락실, 그리고 지금 보면 다소 투박해 보이는 거리 간판들이 질서 없이 놓여 있었고, 교복과 사복이 뒤섞인 학생들의 모습이 어딘가 어수선했다. 그 한복판에서 곧 터지게 될 ‘삼풍백화점 붕괴’는 나라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대형 참사였다.
감독 김보라는 이러한 시대적 비극을 소녀의 개인적 성장 서사와 맞물리게 하여, “커다란 슬픔이 한 순간에 사람들을 덮칠 때, 그 안에 있던 작은 희망들은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여준다. 90년대라는 복고적 공간이 주는 향수와 함께, 무거운 현실감이 함께 압도해오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3. 감독의 의도: 조용한 공감과 위로
김보라 감독은 “청소년 시절, 누구나 겪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이 영화는 은희가 겪는 사소한 상처와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통해, ‘보이는 폭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관심’도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서로를 놓치고, 또 얼마나 작은 계기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에서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건네는 공감과 인정은, 어쩌면 그 시절 우리 대부분이 desperately 바랐던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그 한 마디를 통해, 개인의 고독을 끌어안아주는 작은 온기가 얼마나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4. 영상미: 섬세한 정적과 흔들리는 카메라
《벌새》의 영상미는 강렬하거나 화려하기보다는,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은희의 시선을 따라가듯 ‘살며시’ 담아낸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 기법과 잔잔한 조명은 은희가 처한 불안정한 내면 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옅은 파스텔 톤의 컬러도 90년대 감성을 부드럽게 환기시키며, 마치 오래된 앨범 한 장을 꺼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전부 정적이거나 몽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극중에서 폭발하는 감정들은 오히려 절제된 컷 사이사이를 뚫고 나와 관객의 가슴을 울린다. 이를테면 은희가 가족에게 버럭 소리 지르는 장면은, 잔잔했던 수면 위에 돌을 던진 듯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런 순간들에서, 카메라는 더 이상 멀리서 지켜보지 않고 은희의 얼굴을 가까이 포착하며 그 울분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5. 개봉 당시 흥행 부진 이유: 경쟁과 제한된 스크린
이처럼 작품성이 뛰어난 《벌새》도 개봉 초기에는 대중적 관심이 크게 폭발하지 못했다. 첫째로, 상업 블록버스터와 맞물린 극장 상영 시기가 겹치면서, 예매 스크린 수가 충분치 않았다. 둘째로, 독립영화·예술영화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아직은 좁았던 환경 역시 걸림돌이었다. 셋째로, 청소년기 여성 성장 서사를 정면에 내세운 작품이 흔치 않았고, 마케팅도 대형 배급사 대비 소규모여서 홍보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입소문과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꾸준히 재상영 요청이 이어졌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목소리”라는 평가가 퍼져나가, 개봉 후에도 꾸준히 관심을 받는 ‘롱런 독립영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6. 배우들의 이야기: 인물 자체가 된 연기
은희 역의 박지후는 10대 소녀가 가진 미묘한 감정을 얼굴과 말투에 그대로 실어낸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어딘가 불안정한 시선을 담고, 때론 무표정하게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이 실제 은희와 다르지 않다. 초보 연기자답지 않은 깊이가 느껴져, 관객들은 은희에게서 자신의 과거 모습 혹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영지 선생님 역의 김새벽은 따뜻하고 지적인 에너지를 풍긴다. 그가 스크린에 등장하면, 마치 어두운 방 한구석에 부드러운 햇빛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은희야, 넌 소중해.”라는 대사는 굳이 울먹거리거나 강조하지 않아도, 담담함 속에서 진심이 묻어난다. 그 진심이 극중 은희뿐 아니라 관객의 마음속에도 잔잔하게 스며든다.
그밖에도 은희의 가족을 연기한 정인기(아버지), 이승연(어머니), 손상연(오빠), 박수연(언니) 등 배우들 모두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로 극을 안정감 있게 받쳐준다. 크고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물들 간의 미묘한 갈등과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건, 이들의 현실감 있는 연기 덕분이다.
7. 영화 총평: 누구나 품고 있던, 작은 희망의 기억
누군가에게 1994년은 그저 아득한 과거일 수도 있지만, 《벌새》가 그려내는 세계는 2020년대에도 전혀 낯설지 않다. 가족의 무관심, 친구들과의 갈등,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는 불안정한 마음. 그것은 세대와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가 모두 한 번쯤 겪어왔던 정서이기 때문이다.
김보라 감독은 이 소녀의 여정이 결코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신,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리는 작은 목소리들, 말하지 못하고 삼켜온 눈물,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던 작은 결심들이 모여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서 위로받고, 또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벌새》가 주는 감동은 크게 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에 가깝다. 한걸음 나아갈 용기가 없을 때, ‘그래도 너는 괜찮아’라고 부드럽게 등 뒤에서 떠밀어 주는 느낌.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방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내 지난날의 흔적과 묵묵히 마주하고 싶어진다. 그때의 나를 안아주지 못해 미안했고, 지금의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벌새》는 개인의 작고 여린 성장기가 곧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한 소녀가 내딛는 작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어쩌면 우리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커다란 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 울림이 모두에게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을 인정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전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이 작은 벌새는 울타리를 돌아 또다시 날갯짓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에도 잔잔한 진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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