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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과 나딘 라바키가 펼치는 현실의 시

by reward100 2025. 3. 6.

Film, Capharnaum, Lebanon movie, 2018

 

카메라가 포착한 살아있는 상처들

레바논 출신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Capernaum)'은 단순한 영화 이상의 존재감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혼돈'이라는 뜻을 지닌 제목처럼 이 작품은 베이루트 빈민가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여과 없이 담아내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혼돈 속에서 라바키 감독은 놀라운 시적 질서를 창조해낸다. 카메라는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는 이야기를 비선형적 구조로 풀어낸다.

특히 라바키 감독의 다큐멘터리적 연출은 영화의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비전문 배우들과 실제 난민들을 출연시키고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된 흔들리는 화면은 마치 우리가 자인의 일상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적 선택이 아니라 라바키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다. "당신은 이 현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인, 존재의 무게를 품은 소년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자인은 21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역 캐릭터 중 하나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숙하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에는 아이다운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로 시리아 난민 출신으로 그의 연기는 '연기'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다. 그의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은 가슴 아픈 현실의 증언이다.

자인이 동생 사하르(하이타 '세다' 이자)를 지키려는 모습, 에티오피아 불법체류자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과 아기 요나스(볼루와타프 트레저)를 가족처럼 돌보는 장면들은 영화의 가장 따뜻한 순간들이다. 이 따뜻함이 있기에 영화는 단순한 '빈곤 포르노'를 넘어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라바키 감독은 자인을 통해 묻는다. "아이가 태어날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는 누가 보장하는가?"


나딘 라바키, 경계를 허무는 시네아스트

'가버나움'은 나딘 라바키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로 그녀의 예술적 여정에서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배우로 출발해 감독이 된 라바키는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직관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감각은 레바논 내전 속에서 성장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가버나움'에 특별한 진정성을 부여한다.

라바키 감독의 가장 큰 재능은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표현 사이의 균형을 찾는 능력이다. '가버나움'은 분명 정치적 작품이지만 결코 교조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대신 그녀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 -사랑, 분노, 희망, 절망- 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카메라는 캐릭터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비추며 관객이 그들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특히 라바키 감독의 여성주의적 시선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 -자인의 어머니 수아드(카우사르 알 하다드), 라힐, 사하르- 은 모두 가부장적 사회와 경제적 압박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라바키는 이들을 단순한 희생자로 그리지 않고 복잡한 내적 갈등과 강인함을 지닌 입체적 인물로 그려낸다.


문명의 틈새에서 발견하는 인간성

'가버나움'의 배경이 되는 베이루트 빈민가는 그저 비참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이곳은 현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가 집약된 마이크로코즘(소우주)이다. ID 카드 하나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세계, 아이들이 가정부보다 저렴한 노동력으로 취급되는 현실, 이는 단지 레바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특히 서류의 존재 여부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은 자인, 불법체류자 라힐, 서류 한 장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의 가치는 정말 종이 한 장에 달려 있는가?"

라바키 감독의 카메라는 이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베이루트의 황혼, 자인과 요나스가 세차게 춤출 때 길거리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이어지는 사랑의 언어들. 이 순간들은 모든 카오스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성의 불빛을 보여준다.


영화언어의 혁신 -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서

'가버나움'의 가장 인상적인 측면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다. 라바키 감독은 6개월 넘게 베이루트 빈민가를 탐방하며 리서치했고 실제 난민들의 이야기를 스크립트에 반영했다. 500시간이 넘는 촬영 분량을 편집한 결과물은 마치 현실의 창문을 열어놓은 듯한 생생함을 선사한다.

크리스토퍼 아운(Christopher Aoun)의 촬영은 이러한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는 추적 샷, 캐릭터들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는 친밀한 시선, 베이루트의 혼잡한 풍경을 포착하는 넓은 앵글 샷의 조화는 관객을 영화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킨다.

음악 감독 크리스토프 라데스(Khaled Mouzanar)의 미니멀한 스코어 역시 영화의 감정적 깊이를 더한다. 그의 음악은 결코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인의 내면 여정을 섬세하게 반영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인의 ID 사진을 찍는 순간에 흐르는 음악은 슬픔과 희망, 절망과 해방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완벽하게 담아낸다.


대화하는 영화 - 관객과의 계약

'가버나움'은 단순히 보고 잊어버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요구한다. 자인이 법정에서 던지는 질문 -"내가 왜 태어났습니까?"- 는 사실 관객에게 향한 것이다. 라바키 감독은 관객에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라고 초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ID 사진을 찍는 자인의 미소는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순간이다. 이 미소는 희망의 표현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대한 냉소적 항복인가? 라바키 감독은 그 해석을 관객에게 맡긴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영화의 메시지가 단순한 '동정'이나 '인식 제고'를 넘어 개인적 책임과 행동에 대한 촉구임을 암시한다.


결론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 영화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는 인간적 진실 때문이다. 라바키 감독은 가장 지역적이고 특수한 이야기를 통해 가장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있는가?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션 등 '가버나움'이 받은 국제적 인정은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증명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기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자인의 얼굴, 그의 분노와 슬픔과 결국에는 희망은 우리 시대의 초상화가 되었다.

'가버나움'과 나딘 라바키의 진정한 성취는 예술과 현실 사이의 벽을 허문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