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오징어가 되어 목숨 걸고 뛰고 있다
프롤로그: 괴물이 된 동심
어릴 적 우리가 뛰놀던 그 놀이터가 어른이 되어 목숨을 거는 경기장으로 변했다. 분홍빛 복면 아래 가려진 얼굴들,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456명의 번호표, 그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움직이다 발각된 이들을 처단하는 거대한 소녀 인형의 냉혹한 시선.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이처럼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놀이를 죽음의 무대로 탈바꿈시키며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충격은 단순한 살육의 장면이 아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가에 있다.
어린이 놀이터에 숨겨진 철학적 심연
오징어 게임의 진정한 공포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는 선택의 과정에 있다. 이 작품은 마치 현대판 철학 실험실처럼 기능한다.
트롤리 딜레마가 이론적 질문이라면 오징어 게임은 그 질문을 피와 살로 구현한다. 구슬치기에서 알리(199번)와 상우(218번)가 마주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이 단순한 선택지 앞에서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 상우가 알리를 속이는 장면은 단순한 배신이 아닌 생존이라는 근원적 욕구 앞에 무너지는 윤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칸트와 공리주의의 오랜 논쟁이 이 게임장에서 피를 흘리며 펼쳐진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할 것인가, 아니면 목적으로 대할 것인가?"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수단으로 삼지만 기훈(456번)은 때때로 타인(001번 노인, 067번 새벽)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그들에게 진정한 '선택'이 있었는가? 투표로 게임을 중단할 자유가 주어졌을 때 왜 대다수는 죽음의 게임장으로 돌아오는가? 이는 마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자유롭게' 선택했으나 그 선택은 빚과 빈곤이라는 무게에 짓눌린 가짜 자유가 아니었는가?
네온사인 아래 드러난 자본주의의 민낯
오징어 게임은 네온색 세트장과 동화 같은 미장센 속에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이 게임의 설계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참가자를 평등하게 대한다." 그러나 이 '평등'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모두가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규칙에 따라 경쟁하지만 이는 단지 '공정한 경쟁'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각자가 가진 신체적 조건, 지능, 인맥, 경험의 차이가 생존을 좌우한다. 마치 현실 사회에서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을 부여한다고 하지만 출발선이 이미 다른 것과 같다.
VIP라 불리는 마스크 쓴 관객들은 이 게임의 진정한 수혜자다. 그들은 타인의 죽음을 오락거리로 소비하며 인간의 생명에 내기를 건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위 1%가 나머지 99%의 노동과 고통을 어떻게 소비하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은유다. "당신들은 말 그대로 돈의 노예입니다"라고 프론트맨이 말하는 순간 그것은 게임 참가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001번 노인이 이 모든 게임의 설계자라는 사실이다.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라는 그의 대사는 극단적 부의 축적이 가져오는 도덕적 공허를 상징한다. 돈이 삶의 목적이 되었을 때 그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실존적 공허가 인간을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와 어른 사이의 서사적 줄타기
오징어 게임의 서사는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교묘하게 중첩시킨다.
왜 하필 '어린이 놀이'인가? 이는 단순한 향수 마케팅이나 한국적 정서를 겨냥한 선택이 아니다. 어린 시절 단순했던 놀이와 규칙이 어른이 되면서 얼마나 복잡하고 잔인해지는지 그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는 장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이다 죽는 참가자들은 마치 사회라는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탈락하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게임의 순서 또한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가만히 있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시작해, 개인의 정교한 기술(달고나), 다음은 팀으로서의 협력(줄다리기)이 요구되고 결국 가장 친밀한 관계마저 배신해야 하는 구슬치기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인간이 사회화되는 과정, 학교에서 사회로, 그리고 경쟁이 심화될수록 인간관계마저 희생되는 현대인의 삶의 경로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야기 구조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참가자들이 한번 현실로 돌아갔다가 자발적으로 다시 게임에 복귀하는 전개다. 이는 단순한 서스펜스 장치가 아니라 게임장보다 때로는 더 잔인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암시다. 기훈이 돌아간 현실에서 마주한 무관심, 소외, 좌절은 총알보다 때로는 더 치명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현실이 이미 게임화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게임의 규칙이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깨닫게 하는 장치다.
타인의 생존을 위한 심리 실험실
오징어 게임의 공간은 심리 실험실로도 기능한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극한 상황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대응 방식이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이펙트'나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처럼 오징어 게임은 특정 환경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장덕수(101번)와 같은 인물은 처음부터 반사회적 성향을 띠지만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던 조상우가 점차 냉혹한 살인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반면 기훈이라는 캐릭터는 흥미로운 대조점을 제공한다. 처음엔 도박 중독자이자 실패한 아버지로 그려지지만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의 인간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마치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묘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인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연상시킨다.
특히 '줄다리기' 에피소드는 집단 지성과 협력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리적으로 열세인 팀이 전략과 협력으로 승리하는 과정은 개인주의적 경쟁만이 아닌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협력조차 다른 팀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이 제시하는 시스템 비판의 깊이가 드러난다.
파스텔 색조 속 감춰진 비주얼 코드
오징어 게임의 시각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 체계다. 파스텔 톤의 계단과 복도, 동화 속 세트장, 핑크색 유니폼을 입은 관리자들... 이 모든 것이 유치원 놀이터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며 더 큰 충격을 준다.
이 시각적 대비는 현대 사회의 본질을 암시한다. 우리는 화려한 쇼핑몰, 밝은 네온사인, 세련된 인테리어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착취와 불평등, 빈곤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숨어있지 않은가?
게임장 곳곳에 숨겨진 시각적 코드도 주목할 만하다. 벽에 그려진 게임 힌트들, ○△□ 도형으로 계급이 구분된 관리자들, 참가자들을 담는 선물상자 모양의 관... 이 모든 것은 관객의 무의식에 침투하는 시각적 메타포다. 특히 마지막 결승전이 펼쳐지는 비 내리는 골목길 세트는 다시 '현실'로의 귀환을 암시하며 결국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졌음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 우리 모두가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라면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한국적 소재의 신선함이나 잔혹한 볼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 -자본주의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경쟁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지, 시스템의 희생자이면서도 가해자가 되는 우리의 위치- 이 전 지구적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훈이 빨간 머리로 변신하고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은 단순한 속편 복선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을 인식하고 저항하기로 선택한 개인의 각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저항조차 시스템이 설계한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남긴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이다. 우리의 녹색 트레이닝복이 정장이나 캐주얼 의류로 바뀌었을 뿐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오징어 게임은 우리에게 묻는다. - 당신은 이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규칙 자체에 도전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함께 놀이를 한다." 이 무고한 어린이 놀이의 규칙이 어떻게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체제가 되었는지 오징어 게임은 그 추악한 진실을 알록달록한 색채 속에 가두어 우리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