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삶이라는 이름의 무한 연극, 그 연출가의 초상
찰리 카우프만 (Charlie Kaufman) 감독의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은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자기 성찰의 가장 극단적인 지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연극 연출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 시간과 기억, 현실과 허구, 그리고 끊임없이 분열하고 확장하며 끝내 그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자아(自我)에 대한 거대하고도 복잡한 철학적 탐구이며 관객을 존재론적 미로 속으로 기꺼이 밀어 넣는 지적 도전이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이 타인의 현실을 조작하는 외부의 침략자였다면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 케이든 코타르 (필립 시모어 호프먼, Philip Seymour Hoffman 분)는 자기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속에서 스스로 거대한 연극이라는 감옥을 짓고 그 안에 갇혀버리는 내면의 건축가이자 죄수이다.
케이든 코타르: 질병과 죽음의 공포 속, 예술로 삶을 붙잡으려는 시도
영화는 연극 연출가 케이든 코타르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쇠락과 함께 시작한다. 원인 모를 질병들이 그의 몸을 잠식하고 아내 아델 (캐서린 키너, Catherine Keener 분)은 딸 올리브와 함께 베를린으로 떠나버린다. 죽음의 공포와 상실감,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진 케이든은 맥아더 펠로우십이라는 천재적인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막대한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지극히 진솔하고 거대한 연극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는 단순한 예술적 야심을 넘어 덧없이 흘러가고 스러져가는 자신의 삶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붙잡아 영원히 보존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는 뉴욕의 거대한 창고 안에 실제 크기의 도시 세트를 짓고 자신의 삶과 주변 인물들을 연기할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삶의 재현'이라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케이든의 문제는 그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현재 진행형인 자신의 삶,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변화까지 실시간으로 연극에 반영하려 한다. 연극 속 배우들은 실제 인물들을 연기하고 실제 인물들은 그 연극을 관람하며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케이든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 새미 (톰 누넌, Tom Noonan 분)가 등장하고 새미는 다시 케이든을 관찰하며 그의 연기를 수정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연극은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은 다시 연극을 모방하는 무한한 자기 반영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지도 제작자들의 제국'처럼 재현하려는 대상(삶)과 재현물(연극)이 동일한 크기가 되고 끝내 그 경계가 소멸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시네도키(Synecdoche)의 확장: 부분으로 전체를, 개인으로 우주를 담으려는 욕망
영화의 제목 '시네도키(Synecdoche)'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제유법)을 의미한다. 케이든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라는 '부분'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경험, 즉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시간과 소멸이라는 '전체'를 담아내려 한다. 그의 연극은 단순히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 인간 조건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가 되기를 갈망한다. 창고 안의 뉴욕 세트는 점점 더 확장되어 도시 전체를 삼킬 듯 커지고 수많은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 속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케이든은 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만 삶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처럼 그의 연극 역시 그의 손을 벗어나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연극 속 인물들은 실제 인물들과 뒤섞이고 시간은 뒤죽박죽 흐르며 현실과 연극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진다. 케이든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헤이즐 (서맨사 모턴, Samantha Morton 분), 클레어 (미셸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 분), 태미 (에밀리 왓슨, Emily Watson 분) 등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관계를 맺고 그 배우들은 다시 실제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진정한 '삶'은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케이든이 자신의 삶을 재현하려 할수록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실제 삶으로부터 소외되고 연극이라는 허구 속에 고립된다. 그는 연극의 신(연출가)이 되려 했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재구성: 붙잡을 수 없는 현재, 왜곡되는 과거
'시네도키, 뉴욕'은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 속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수십 년의 세월이 압축되어 나타나거나 갑자기 건너뛰기도 한다. 케이든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연극 속에 붙잡아 두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속절없이 흐르고 그의 몸과 정신을 쇠락하게 만든다. 그의 기억 역시 불확실하고 파편적이다. 그는 과거의 사건들을 연극을 통해 재구성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억은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재해석된다. 연극 속에서 재현되는 과거는 실제 과거와 동일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재의 관점과 감정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된다.
특히 딸 올리브와의 관계는 이러한 시간과 기억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베를린으로 떠난 딸은 성장하여 케이든을 찾아오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있다. 케이든은 연극을 통해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이해하려 하지만 연극 속 딸의 모습은 실제 딸과는 다른 그의 죄책감과 그리움이 투영된 허상일 뿐이다. 또한, 아내 아델의 죽음, 연인 헤이즐의 죽음 등 주변 인물들의 죽음은 케이든에게 시간의 유한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는 죽음을 연극의 일부로 만들려 하지만 죽음은 결코 재현되거나 통제될 수 없는 궁극적인 현실이다.
자아의 분열과 확장: '나'는 누구인가? 끝없는 역할 바꾸기
영화 후반부, 케이든은 자신의 연극 속에서 점점 더 주변부로 밀려난다. 그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 새미에게 연출가의 역할을 넘겨주고 자신은 청소부 엘렌 (다이앤 위스트, Dianne Wiest 분)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엘렌의 역할을 연기하던 배우(제니퍼 제이슨 리, Jennifer Jason Leigh 분)가 다시 케이든의 역할을 맡는 등, 역할 바꾸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케이든의 자아가 끊임없이 분열하고 해체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거대한 연극 속에서 이름 없는 역할 중 하나로 전락한다.
이러한 자아의 분열은 현대인의 파편화된 정체성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지만 그 역할들 뒤에 숨겨진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케이든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수많은 역할과 가면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그가 마지막 순간, 엘렌의 목소리(연출가의 지시)를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연출하지 못하고 타인의 지시에 따라 생을 마감하는 존재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연극의 연출가였지만 동시에 그 연극 속에서 가장 길 잃은 배우였던 것이다.
결론: 삶이라는 연극의 비극적 희극성, 그리고 카우프만의 세계
'시네도키, 뉴욕'은 삶의 복잡성과 모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필멸성,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노력을 거대하고도 정교한 메타포로 그려낸다. 이 영화는 쉽고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수많은 질문과 해석의 가능성을 던지며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찰리 카우프만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불안과 욕망을 파헤치고 그것을 블랙코미디적인 상상력과 철학적 깊이로 버무려낸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케이든 코타르의 무한히 확장되는 연극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 실패 자체가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조건 –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는 과정 – 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시네도키, 뉴욕'은 한번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볼수록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발견하게 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성취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