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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품과 복제품, 관계의 진실 게임: '사랑을 카피하다'

by reward100 2025. 5. 4.

 

Film, Certified Copy, 2010

서론: 투스카니의 하루, 진짜 같은 가짜 혹은 가짜 같은 진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Abbas Kiarostami) 감독의 '사랑을 카피하다 (Certified Copy / Copie conforme, 2010)'는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하루 동안의 만남을 통해 진품과 복제품, 원본과 카피, 현실과 허구, 그리고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지적이고도 매혹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는 '복제품도 진품만큼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 '공인된 복제품(Certified Copy)'을 출간한 영국 작가 제임스 밀러 (윌리엄 쉬멜, William Shimell 분)와 그의 강연회에 참석한 프랑스 출신 골동품상 여성 엘르 (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 분)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엘르는 제임스에게 투스카니 안내를 자청하고 두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작은 마을 루치냐노(Lucignano)로 향하며 예술, 삶, 그리고 관계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처음에는 작가와 독자, 혹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남녀의 만남처럼 보이던 그들의 관계는 한 카페 주인의 오해를 계기로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역할극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영화는 끝까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연기인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특유의 미니멀리즘적인 연출과 롱테이크, 그리고 인물들의 대화와 시선에 집중하며 관객 스스로 관계의 진실과 의미를 찾아 나서도록 유도하는 섬세하고도 지적인 게임을 펼친다.

원본과 복제품: 예술 작품에서 인간관계로의 확장

영화의 핵심 주제는 제임스의 책 제목이기도 한 '공인된 복제품(Certified Copy)'의 개념이다. 제임스는 예술 작품에 있어 원본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복제품 역시 그 자체로 미적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이러한 예술 작품에 대한 논의를 자연스럽게 인간관계, 특히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엘르와 제임스의 관계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주된다. 처음 만난 남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연인,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권태로운 부부 등 그들은 마치 다양한 관계의 '복제품'들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짜 관계는 무엇인가? 그들은 정말 처음 만난 사이인가, 아니면 실제 부부인데 역할극을 하는 것인가? 혹은 이 모든 것이 제임스의 책 내용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려는 엘르의 계획된 연출인가?

키아로스타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의도적으로 유보한다. 대신 그는 두 인물의 대화와 미묘한 감정 변화, 그리고 그들이 방문하는 장소(결혼식이 자주 열리는 마을, 박물관의 복제품 그림 등)를 통해 원본과 복제품의 경계가 생각보다 모호하며 때로는 복제품이 원본보다 더 진실하거나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예를 들어, 엘르와 제임스가 마치 실제 부부처럼 다투고 화해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연기' 속에는 오랜 관계에서 비롯된 권태, 실망, 애증,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애정의 감정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는 사회적 역할(남편, 아내, 연인 등)을 수행하는 '연기'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연기 속에서 진정한 감정과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진품 같은 복제품처럼 연기 같은 진실 혹은 진실 같은 연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와 시선: 관계의 역학과 소통의 가능성 탐구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의 대화와 시선에 집중하여 관계의 미묘한 역학과 감정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다. '사랑을 카피하다' 역시 대부분의 장면이 엘르와 제임스 두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차 안에서,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박물관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그 대화는 종종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상대방을 미묘하게 비판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제임스는 이성적이고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예술과 삶에 대해 논평하고 엘르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관계의 중요성과 감정의 진실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대화는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이론과 실제 사이의 영원한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영화는 두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카메라가 그들을 담아내는 방식에 주목한다. 자동차 안에서의 대화 장면에서는 종종 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하는 듯한 구도가 사용되는데 이는 마치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부재 혹은 소통의 단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걸을 때 카메라는 종종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가거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들의 관계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반영이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카페에서 엘르가 제임스에게 화장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며 그의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나 제임스가 엘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 등은 그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적 거리와 소통의 어려움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결국 그들의 대화와 시선은 관계를 진전시키는 동시에 오해를 낳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방어기제가 되기도 한다.

루치냐노 마을: 시간의 흔적과 관계의 순환

엘르와 제임스가 방문하는 투스카니의 작은 마을 루치냐노는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자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 마을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며 특히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마을 곳곳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고 오래된 건물과 예술 작품들은 원본과 복제품,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엘르와 제임스는 이 마을을 거닐며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다양한 관계의 단계를 경험한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목격하기도 하고 결혼 서약을 하는 동상을 보며 관계의 영원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며 오래된 호텔 방에서는 권태로운 부부의 모습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마치 사랑과 관계가 시작되고, 지속되고, 때로는 위기를 맞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지는 순환적인 과정을 함축하는 무대와 같다. 엘르와 제임스의 관계 역시 이러한 순환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정말 오래된 부부라면 이 마을 방문은 그들의 관계를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처음 만난 사이라면 이 마을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그들이 겪게 될 관계의 다양한 단계를 미리 보여주는 예행연습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루치냐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관계의 의미와 가치가 어떻게 변화하고 지속될 수 있는지 그리고 '복제품'처럼 보이는 현재의 관계 속에서도 '진품'과 같은 진실한 감정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열린 결말: 진실 게임의 승자는 누구인가?

영화는 엘르와 제임스가 처음 만났던 호텔 방과 유사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제임스는 다음 날 기차 시간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엘르는 아쉬움과 실망감을 내비친다. 창밖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제임스는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응시한다. 그들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들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영화는 끝내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의도적인 선택이며 관객에게 해석의 주도권을 넘기는 방식이다.

과연 그들의 하루는 정교하게 계획된 역할극이었을까? 아니면 우연한 만남 속에서 피어난 즉흥적인 감정의 교류였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인가를 판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보낸 하루 동안 경험한 감정과 소통의 과정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들의 관계가 비록 '복제품'이나 '연기'였을지라도 그 속에서 느꼈던 설렘, 실망, 다툼, 화해의 감정들은 '진실'했을 수 있다. 영화는 진품과 복제품, 현실과 허구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 그 경계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풍부함,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사랑을 카피하다'는 관객에게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적이고도 여운이 깊은 진실 게임이다.

결론: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섬세하고 지적인 탐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는 예술 작품의 진위 논쟁을 인간관계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랑과 관계의 본질, 그리고 정체성의 유동성에 대한 섬세하고도 지적인 탐구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아름다운 투스카니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하루 동안의 여정은 현실과 허구, 진심과 연기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관객에게 흥미로운 지적 게임을 선사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미니멀한 연출과 인물들의 대화, 시선에 집중하며 관계의 미묘한 역학과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명확한 해답 대신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관계의 진정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랜 시간이라는 '원본'만이 가치를 가지는가, 아니면 현재의 감정과 교감이라는 '복제품' 역시 진실할 수 있는가?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