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넷 (TENET)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 엘리자베스 데비키 | 2020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거대한 퍼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은 그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인버전(Inversion)'이라는 전례 없는 개념을 통해 관객의 지적 호기심을 극한으로 자극하는 SF 액션 스릴러다. 영화는 미래로부터 시간을 역행하여 현재로 침투하는 기술과 그로 인해 발발할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이름 없는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 분), 일명 '주도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테넷'은 단순한 오락 영화를 넘어 엔트로피, 자유 의지, 운명론 등 복잡한 과학적, 철학적 개념들을 서사 속에 녹여내며 관객에게 능동적인 해석과 반복 관람을 유도하는 거대한 지적 퍼즐과도 같은 작품이다. 본 감상평에서는 '테넷'의 핵심 개념인 인버전의 의미, 복잡한 서사 구조, 그리고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을 중심으로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인버전: 엔트로피와 시간의 역행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은 '인버전'이다. 이는 사물의 엔트로피를 역전시켜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만드는 기술로 미래의 인류가 개발하여 현재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인버전된 총알은 발사된 후 총구로 돌아오고 파괴된 건물은 순식간에 복구되며 인버전된 사람은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이동한다. 놀란 감독은 이러한 인버전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정교한 촬영 기법과 특수 효과를 활용하여 관객에게 전례 없는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들, 특히 카체이싱 시퀀스나 공항에서의 격투 장면은 시간의 흐름이 뒤섞이는 혼란스러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할아버지의 역설과 자유 의지의 문제
'테넷'은 인버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가 가능해지면서 필연적으로 '할아버지의 역설(Grandfather Paradox)'과 같은 시간 여행의 고전적인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자신은 태어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이 역설은 시간 여행 영화의 단골 소재다. '테넷'은 이러한 역설에 대해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What's happened, happened.)"라는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유 의지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러한 모호함은 영화에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며 관객에게 운명과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버전된 세계에서는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고 불은 차갑게 느껴지며 모든 물리 법칙이 반대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시각적 볼거리를 넘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의 단일한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는 인버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간의 본질,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사유를 펼쳐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사: 놀란의 시간 미로
'테넷'의 서사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교차하고 동일한 사건이 다른 시간대의 다른 관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는 관객에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며 한 번의 관람으로는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성은 놀란 감독이 의도한 지적인 유희의 일부로 관객이 영화의 단서들을 조합하고 전체 그림을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지적인 쾌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순행하는 팀과 역행하는 팀이 협공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협공(Temporal Pincer Movement)' 장면은 서사적 복잡성의 정점을 보여주며 놀란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에 감탄하게 만든다.
닐 (로버트 패틴슨): "무지가 우리의 가장 큰 무기야."
주도자 (존 데이비드 워싱턴): "이해하려고 하지 마. 느껴."
이러한 대사들은 영화의 복잡한 개념과 서사를 대하는 관객의 자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영화가 제시하는 시간의 흐름과 감각적인 경험에 집중할 때 '테넷'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야 하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이전의 이해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로 만들며 영화에 더욱 깊이 몰입하도록 이끈다.
인물과 역할: 거대한 계획 속의 체스 말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연기한 주도자는 이름조차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로 관객이 영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그는 뛰어난 신체 능력과 판단력을 가졌지만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인버전의 비밀 앞에서 끊임없이 혼란을 겪고 배우며 성장한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닐은 주도자의 조력자이자 미스터리한 인물로 능숙하게 상황을 조율하고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며 극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의 정체와 주도자와의 관계는 영화의 중요한 반전 요소 중 하나다.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연기한 캣은 무기상이자 악당인 남편 사토르(케네스 브래너 분)에게 억압받는 인물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하며 주인공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안드레이 사토르는 미래와 현재를 연결하는 무기상이자 영화의 주요 악당이다. 그는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려는 위험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광기와 잔혹함은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들 캐릭터는 각자의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복잡하게 얽히며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치 체스 말처럼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압도적인 스케일: 시각과 청각의 향연
'테넷'은 놀란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스케일과 시각적 스펙터클을 자랑한다. 실제 보잉 747기를 폭파시키는 장면이나 여러 국가를 넘나드는 로케이션 촬영은 영화에 현실감을 더하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인버전된 액션 시퀀스들은 CG를 최소화하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촬영되어 독특한 질감과 긴장감을 선사한다. 루드비히 괴란손이 작곡한 영화 음악 또한 '테넷'의 중요한 요소다. 역행하는 듯한 사운드와 강렬한 비트는 영화의 시간 개념과 완벽하게 조응하며 각 장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관객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