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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일상의 운율, 시가 되는 삶

by reward100 2025. 5. 12.

 

Film, Paterson, 2016

서론: 반복되는 일주일, 그 안에 숨겨진 시적 순간들

짐 자무쉬 (Jim Jarmusch) 감독의 '패터슨 (Paterson, 2016)'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 없이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애덤 드라이버, Adam Driver 분)의 반복되는 일주일을 잔잔하고도 시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영화이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Golshifteh Farahani 분)에게 입맞춤하고, 시리얼을 먹고,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의 대화를 엿듣고, 점심시간에는 폭포 옆 벤치에 앉아 비밀 노트에 시를 쓰고, 퇴근 후에는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 마빈과 함께 산책을 하며 단골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시는 패터슨의 일상은 단조롭고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자무쉬 감독은 이러한 반복적인 일상 속에 숨겨진 작은 변화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서 시적 영감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기록하는 한 개인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패터슨'은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서사 대신 일상의 리듬과 관찰의 즐거움, 창작의 의미, 그리고 소박한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가치를 관조적인 미니멀리즘 미학으로 그려내며 관객에게 조용한 위로와 깊은 여운을 선사하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작품이다.

패터슨 시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 이름과 장소, 정체성의 반영과 일상의 시학

영화의 주인공 이름과 그가 사는 도시의 이름이 모두 '패터슨'이라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는 주인공 패터슨이 자신이 속한 장소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정체성이 그 도시의 역사와 일상 속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패터슨 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같은 유명한 시인들이 거쳐간 곳으로 영화는 이러한 시적 전통을 배경으로 패터슨의 시 쓰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버스를 운전하며 도시 곳곳을 누비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승객들의 소소한 대화 속에서 시적 영감을 얻는다. 그의 시는 거창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갑, 떨어지는 물,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 등 일상적인 사물과 경험들을 자신만의 섬세한 언어로 담아낼 뿐이다. 이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주창한 "사물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No ideas but in things)"는 시 정신과 맞닿아 있으며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패터슨의 직업인 버스 운전사 역시 그의 시 쓰기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버스는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과 풍경들을 실어 나르는 움직이는 관찰대이며 패터슨은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그는 승객들의 대화에 직접 끼어들기보다는 조용히 귀 기울이며 그들의 삶의 단면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적 언어로 변환시킨다. 그의 시는 마치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오직 비밀 노트에만 적어두는데 이는 그의 시 쓰기가 명성이나 인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과 소통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임을 보여준다. 패터슨에게 시는 삶의 일부이자 반복되는 일상에 리듬과 의미를 부여하는 그만의 방식인 것이다.

일상의 관찰과 시 쓰기: 평범함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영감의 순간들

'패터슨'은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일주일을 요일별로 나누어 보여주지만 그 반복 속에는 미묘한 차이와 새로운 발견이 존재한다. 패터슨은 매일 비슷한 경로로 버스를 운전하지만 창밖의 풍경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승객들의 대화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는 이러한 일상의 작은 변화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것을 자신의 시적 영감으로 삼는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성냥갑, 폭포의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움직임, 아내가 칠한 샤워 커튼의 동그라미 무늬, 바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 등 모든 것이 그의 시의 소재가 된다. 영화는 패터슨이 시를 쓰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의 시선과 그가 포착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관객이 그의 시적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화면 위에 겹쳐지는 패터슨의 손글씨 시들은 그의 내면 풍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일상적인 언어가 어떻게 시적인 언어로 변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시이다.

영화 속에서 패터슨이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 역시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어린 소녀 시인,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청년, 바에서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는 남자 등 그들의 이야기는 패터슨의 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예술이 결코 고립된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 속에서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인 시인이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하며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실과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암시하며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결국 패터슨의 시 쓰기는 세상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과 애정 어린 관찰의 결과이며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자무쉬 감독의 믿음을 반영한다.

로라의 세계: 꿈과 창조성, 흑백의 조화와 일상의 예술가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의 삶에 가장 큰 영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꾸고 도전하며 자신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집 안 곳곳에 발산한다. 컵케이크를 만들어 장터에 팔 계획을 세우고 기타를 배워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하며 온 집안을 흑백의 동그라미 무늬로 칠하고 커튼과 옷까지 직접 디자인한다. 그녀의 행동은 때로는 다소 엉뚱하고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만들려는 순수한 열정이 담겨 있다. 그녀의 집은 마치 그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캔버스처럼 흑백의 패턴과 다채로운 창작물들로 가득 차 있다. 흑백이라는 단순한 색채 조합은 오히려 그녀의 창의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며 패터슨의 조용하고 관조적인 세계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로라는 패터슨의 시를 가장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첫 번째 독자이다. 그녀는 패터슨에게 그의 시가 훌륭하며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그의 비밀 노트를 복사해두라고 조언한다. 비록 패터슨은 그녀의 제안을 머뭇거리지만 로라의 존재는 그가 계속해서 시를 쓸 수 있는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된다. 그녀는 패터슨의 조용한 창작 활동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그에게 안정적인 사랑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한다. 패터슨과 로라의 관계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라는 패터슨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주는 뮤즈이자 그의 일상에 색채와 활기를 불어넣는 사랑스러운 파트너이다. 그녀의 존재는 패터슨의 시가 단지 고독한 내면의 독백이 아니라 사랑과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교감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마빈과 작은 만남들: 일상의 에피소드, 관계의 소소한 풍경과 유머

영화에는 패터슨과 로라의 애완견인 불독 마빈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여 예상치 못한 유머와 갈등을 만들어낸다. 마빈은 매일 아침 패터슨을 깨우고, 산책길에 우체통을 넘어뜨리며, 로라의 컵케이크를 몰래 먹어 치우고, 결정적으로 패터슨의 비밀 시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대형 사고를 친다. 마빈의 행동은 때로는 패터슨을 곤란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의 단조로운 일상에 작은 파문과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특히 패터슨이 마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그의 고립된 세계를 외부와 연결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마빈은 말 못 하는 동물이지만 그의 존재는 패터슨의 일상에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제공하며 삶의 아이러니와 유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패터슨이 버스 안에서 혹은 바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짧은 만남들 역시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서로 다른 꿈과 고민을 가진 그들의 대화는 패터슨에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다가오지만 동시에 그의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아나키스트 학생들의 대화, 공사판 인부들의 연애 이야기, 쌍둥이 형제에 대한 이야기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각자의 삶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며 패터슨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작은 만남들은 패터슨의 시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무쉬 감독은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풍경들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 속에 숨겨진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결론: 자무쉬적 미니멀리즘, 삶이라는 이름의 조용한 시,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

짐 자무쉬의 '패터슨'은 현대 영화의 소란스러움과 극적인 자극에서 벗어나 일상의 평범함과 그 안에 깃든 시적인 아름다움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주일이라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한 버스 운전사이자 시인의 내면 풍경과 창작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에게 조용한 위로와 깊은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애덤 드라이버의 절제되고 깊이 있는 연기는 패터슨이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사랑스러운 매력은 영화에 따뜻한 활기를 더한다. 자무쉬 감독 특유의 미니멀리즘적인 연출 스타일, 즉 느린 호흡, 절제된 대사, 그리고 여백의 미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영화의 의미를 채워나가도록 유도한다. 패터슨의 시 노트가 마빈에 의해 처참하게 찢어졌을 때 그는 깊은 상실감에 빠지지만 우연히 만난 일본인 시인으로부터 받은 빈 노트를 통해 다시 시를 쓸 용기를 얻는다. 이는 삶에서 예기치 않은 상실과 좌절을 겪더라도 언제든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패터슨'은 우리에게 삶 자체가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시를 발견하고 써내려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조용하지만 강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