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감독: 에머랄드 펜넬 | 주연: 캐리 멀리건 | 2020
밤의 사냥꾼: 캐시의 위험한 이중생활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프라미싱 영 우먼'은 달콤한 파스텔톤의 미장센과 발랄한 팝 음악 뒤에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복수심을 숨긴 대담하고 도발적인 스릴러다. 영화는 한때 촉망받던 의대생이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 니나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카산드라 '캐시' 토마스(캐리 멀리건 분)의 이중생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낮에는 커피숍에서 무기력하게 일하지만 밤이 되면 화려하게 치장하고 클럽이나 바에서 만취한 척하며 소위 '착한 남자'들의 위선을 시험하고 그들에게 섬뜩한 교훈을 안기는 캐시.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유희를 넘어 과거의 트라우마와 죄책감,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는 캐시의 시선을 통해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적 시선과 방관, 그리고 가해자 중심적인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과거의 상처와 정의를 향한 갈증
캐시의 모든 행동은 과거 의대 시절 절친했던 니나가 겪었던 끔찍한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니나는 동료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학교와 사법 시스템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고 결국 니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캐시는 니나의 복수를 대신하는 동시에,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상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듯하다. 그녀의 복수 대상은 단순히 가해자들뿐만이 아니다. 사건을 방관했던 친구, 피해자를 비난했던 학장, 그리고 가해자를 변호했던 변호사까지, 그녀는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찾아가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죄책감을 일깨우려 한다. 이 과정에서 캐시는 때로는 치밀한 계획가처럼 때로는 상처받기 쉬운 여린 모습처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며 캐릭터의 입체성을 더한다.
달콤함과 잔혹함의 공존: 파스텔톤 미장센의 역설
영화는 시각적으로 매우 스타일리시하다. 캐시의 의상과 주변 환경은 밝고 화사한 파스텔톤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그녀의 감정은 어둡고 때로는 폭력적이다. 이러한 시각적 대비는 영화의 주제를 더욱 강렬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아름답고 달콤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그리고 여성에게 강요되는 피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듯하다. 팝 음악의 적극적인 활용 또한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때로는 발랄하게, 때로는 긴장감 넘치게 극의 흐름을 이끈다.
캐시의 복수 방식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각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 만족감, 허무함, 그리고 깊어지는 고독감 –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녀의 여정은 정의 실현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측면도 내포하고 있어 관객에게 불안감을 안긴다.
일상 속의 위선: 방관자들과 시스템의 문제
'프라미싱 영 우먼'은 성폭력 문제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사회 전체의 방관과 구조적인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캐시가 만나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그녀의 시험 앞에서 그들의 위선과 이기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또한, 니나의 사건 당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학교 관계자나 법조인들의 모습은 개인의 잘못을 넘어 시스템 전체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며 진정한 정의와 책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캐시: (과거 사건에 대해 침묵했던 친구에게) "그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친구: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내 미래도 중요했으니까."
이러한 대화는 사건 이후 주변인들이 보였던 이기적인 방관과 침묵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캐시는 그들의 변명과 합리화에 맞서며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도록 강요한다.
영화는 캐시의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더 넓은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행동은 극단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를 통해 관객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인식과 폭력에 대한 무감각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논쟁적 결말: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남겨진 질문들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면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캐시의 복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녀 자신마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가 마지막까지 준비했던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또 다른 반전을 선사한다. 이 결말은 통쾌한 복수의 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의 벽 앞에서 개인이 겪는 좌절과 한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선 사회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결말에 대한 평가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지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만큼은 가볍지 않다.
캐리 멀리건은 이 영화를 통해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녀는 사랑스러움과 서늘함, 강인함과 취약함을 동시에 지닌 캐시의 복잡한 내면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며 극을 이끌어간다. 에머랄드 펜넬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임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주제 의식과 감각적인 연출 스타일을 선보이며 차세대 여성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