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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사이의 테이프 필름: 타란티노의 '옛날 옛적 할리우드'

by reward100 2025. 3. 13.

 

Film,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흑백 NBC 로고가 68년도 버전으로 화면에 떠오를 때 관객은 이미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한때 할리우드에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는 노스텔지어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작품이 아니라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감독의 대담한 시도다. 1969년 할리우드라는 시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영화의 본질적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다.

할리우드의 황혼과 새벽 사이에서

비운의 배우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맨 겸 친구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밀려나는 두 인물의 생존기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옛 할리우드와 새 할리우드의 교차점에 선 시대의 초상화다. 타란티노는 풍부한 영화적 언어와 문화적 참조를 통해 196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거리, 스튜디오, 라디오 방송, 심지어 간판까지 완벽하게 재현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타란티노가 '재현'을 넘어 '재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영화사와 현실을 교묘하게 뒤섞으며 릭 달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실제 역사 속에 배치함으로써 '만약에'의 역사를 구축한다. 이는 단순한 비틀기가 아닌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이 가진 본질—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에 대한 경의다.

"친구, 이건 내 커리어의 종말이야." - 릭 달튼이 말하지만 실은 전환점일 뿐이었다.

인물의 깊이: 종이 위의 흔적이 아닌 살아있는 영혼

타란티노가 창조한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는 단순한 캐릭터 이상의 복잡성을 지닌다. 달튼은 자신의 내면 불안과 끊임없이 싸우며 알코올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할리우드의 악명 높은 '소비와 폐기' 시스템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의 8살 배우와의 대화 장면에서 보여주는 진정성과 연기에 대한 열정은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반면 클리프 부스는 표면적으로는 충직한 조력자지만 그 아래 숨겨진 어두운 과거와 폭력성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는 할리우드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상징하며 영화 후반부 맨슨 패밀리와의 대결에서 보여주는 잔혹한 폭력성은 그간의 온화함과 대비되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클리프 부스의 캐릭터는 할리우드의 이중성을 담고 있다. 그는 충성스럽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의 트레일러 집과 핏불 테리어는 표면적 삶과 내면의 갈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샤론 테이트: 현실과 판타지의 교차점

마고 로비가 연기한 샤론 테이트는 이 영화의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타란티노는 실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테이트를 그녀의 죽음이 아닌 삶의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브루어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보며 미소 짓는 테이트의 모습은 영화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할리우드의 꿈이 가진 순수한 매력을 상징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테이트가 주인공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지 않으면서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중심축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희망과 약속을 체현하며 달튼이 갈망하는 '저 너머의 세계'를 상징한다. 테이트의 존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타란티노가 보여주는 대안적 역사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시간의 층위: 느림의 미학

많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의 느린 전개와 165분의 러닝타임을 지적했지만 이는 타란티노의 명확한 의도다. 감독은 '시간'을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며 느린 템포를 통해 1969년 할리우드의 일상적 순간들을 관객에게 경험하게 한다. 클리프가 운전하는 장면들, 릭이 세트장에서 보내는 시간, 테이트가 쇼핑하는 순간들은 단순한 지연이 아닌 사라진 시대의 분위기와 감각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느림'은 영화 후반부 맨슨 가족과의 폭력적 대결 장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평화로운 일상과 극단적 폭력 사이의 갑작스러운 전환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타란티노는 관객을 긴장시키고 이완시키는 과정을 통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메타영화적 성찰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영화 자체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다. 릭이 촬영하는 서부극 '랜스 릭키'의 장면들, 그의 이전 작품 클립들, 심지어 클리프가 시청하는 TV 프로그램까지 타란티노는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미디어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체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릭이 8살 배우 트루디(줄리아 버터스)와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감동적인 장면을 넘어 연기와 현실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타란티노의 성찰을 담고 있다. "연기는 거짓말인데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어요?"라는 트루디의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 된다.

역사의 재해석과 구원의 판타지

타란티노는 이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히틀러의 최후를 재해석했듯이 이 영화에서도 역사의 비극적 순간을 뒤집는다. 맨슨 가족의 계획이 실패하고 테이트가 간접적으로 구원받는 결말은 단순한 위안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대안적 현실 창조'의 힘에 대한 선언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은 타란티노가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그 '주변'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역설적으로 그 무게를 더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관객은 결말을 알면서도 테이트의 운명이 바뀌기를 바라게 되며 이는 영화가 가진 마법 같은 능력—역사를 다시 쓰는 환상적 힘—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결론: 사라진 시대에 대한 송가

타란티노의 9번째 장편 '한때 할리우드에서'는 단순한 향수영화가 아니라 시간과 역사, 영화와 현실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감독은 잔혹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영화를 통해 그 현실을 재구성하고 때로는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달튼이 테이트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릭에게는 새로운 할리우드로의 입성이자 관객에게는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에 대한 아름다운 판타지다. 타란티노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가 가진 구원의 가능성을 조용히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