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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행성의 정원사: '마션(The Martian)'이 심은 인류의 생명의지 우주는 침묵한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소리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The Martian)'은 표면적으로는 생존 영화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류의 첫 행성 정원사의 이야기다. 붉은 황무지에 생명을 심고, 가꾸고, 결실을 맺는 한 인간의 진정한 '테라포밍(terraforming)' 서사이다.황무지에 핀 감자꽃화성에 홀로 남겨진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Matt Damon)의 이야기는 통상적인 생존 서사를 넘어선다. 그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불모지에 생명을 일구는 첫 화성 농부가 된다. 감자를 심는 그의 행위는 지구 역사상 가장 멀리 뻗어나간 농경의 시작이다. 인류의 확장된 영토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농업 혁명이자 인류 진화의 새로운 장.. 2025. 4. 11.
"겟아웃(Get Out)": 흑인의 몸을 통해 들여다본 백인 자유주의의 공포 2017년 개봉한 조던 필의 겟아웃(Get Out)은 일견 단순한 공포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종,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전유에 대한 탁월한 우화가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인종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대부분의 인종 관련 영화들이 노골적인 인종차별이나 역사적 불의를 다루는 데 반해 겟아웃은 더 교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인종차별, 즉 '진보적'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위선과 그들이 실천하는 신식민주의적 문화 전유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인종 문제를 바라본다.신체 식민화라는 메타포영화는 크리스 워싱턴(Daniel Kaluuya 분)이 백인 여자친구 로즈 아미티지(Allison Williams 분)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교외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겉.. 2025. 4. 10.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앤더슨 팔레트에 담긴 세기말의 애도 ; 제목: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감독: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개봉: 2014년주요 출연: 랄프 파인즈 (Ralph Fiennes), 토니 레볼로리 (Tony Revolori), 애드리안 브로디 (Adrien Brody), 윌렘 대포 (Willem Dafoe), 사오이르스 로넌 (Saoirse Ronan) 등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놓인 완벽주의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왜 모든 것이 이토록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앤더슨이 창조한 우주의 축소판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가 모든 여행자를 자신의 침대 .. 2025. 4. 10.
"미나리": 물과 흙 사이의 기억 연금술 정지된 시간 속에서 흐르는 물처럼 이 영화는 우리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고향'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한다.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의 '미나리'는 단순한 이민자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토양학적 내러티브(pedological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땅과 뿌리, 그리고 물이라는 원소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탐구이다.흙을 파헤치는 제이콥(스티븐 연/Steven Yeun)의 손, 세대를 넘어 공유되는 민중지식으로서의 미나리 재배, 그리고 불안정한 이동식 주택은 모두 '뿌리내림'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의 물리적 구현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혁신은 향수(nostalgia)를 시간적 개념이 아닌 공간적 개념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 있다. .. 2025. 4. 9.
"Winter's Bone": 뼈에 새겨진 운명의 암호 산맥의 겨울은 침묵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눈 아래 숨겨질 때 인간의 본질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데브라 그라닉(Debra Granik) 감독의 2010년 작 '윈터스 본(Winter's Bone)'은 단순한 범죄 스릴러나 성장 드라마가 아닌 인류학적 암호 해독의 여정이다. 오자크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우리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사회적 구조물을 뼈에서부터 영혼의 가장 깊은 골수에서부터 읽어내는 법을 가르친다.뼈의 언어학: 침묵의 풍경이 말하는 것오자크 산맥의 풍경은 영화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17세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Jennifer Lawrence)가 해독해야 할 원시적 문자다. 메트 제조자들(불법 메타암페타민을 제조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말은.. 2025. 4. 9.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 기억의 풍경과 존엄성의 서사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감독의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은 단순한 역사적 재현이나 노예제도에 대한 또 하나의 고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시간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기억이 어떻게 생존의 도구이자 고문의 형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미학적 탐구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노예제의 잔혹함에 대한 사실적 재현으로 읽었다면 나는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시간'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철학적 축을 중심으로 구축된 심리적 풍경화라고 본다.기억의 지형도: 솔로몬의 내적 여정영화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Chiwetel Ejiofor)은 단순히 자유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기억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존재다. 그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 갇힌 채 끊임없이 정체성의 균열을.. 2025. 4. 8.